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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

무서워요.
아무도 없는 적적한 밤에, 모카가 홀로 중얼거린 유일한 말이었다. 달빛은 홀로, 미미하게 비추어 그뭄의 사라짐을 겨우 알리어 별조차 유난히 보이지 않던, 그 사람을 처음 좋아하게 되었을 때의 자신 같았다. 아예 안 보이는 것은 아닌데, 모든 것이 희미해 자신을 우롱하는 것만 같았던 그 순간, 왜 다시 찾아온 건지. 모카는 그저 그 무서움을 피하고 싶어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못 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날이 아예 안 올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이리 빨리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그 하나뿐이라서. 아무도 이 감정을 몰라야만 한다고 모카는 세뇌를 걸었다. 자기 자신에게.
그럼에도 무서워서 이리 말로 만들어 홀로 내보내지. 혼자 있을 때만 이런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말은 무서운지라, 다른 사람에게 꺼내어 보여주기 시작하여 사람 손을 거치게 하면, 생각해내고 싶지 않은 괴물로 변해버리기 쉽상이니까. 이런 본인의 모습은 아무도 모를 것이고, 그래야만 한다. 자신이 괴물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지휘사님도, 방송국 사람들도, 당신도 나를 버리겠지. 모카를 비추는 달빛은 너무나도 흐릿해서, 마치 그의 심정을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것만 같았다. 아, 이렇게까지 보여줄 필요는 없는데. 세상이 자신을 우롱하는 것만 같아서 모카는 그저 무력하게 응하지 않기만 하였다.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이것 뿐이다.
미소를 지어, 웃자. 웃으며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이런 감정은 처음부터 없었던 척. 아, 감정이 아니라 괴물이었지. 이것이 본인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일진데, 왜 점점 온 몸의 기력이 빠지는 것만 같은지. 왜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해야지만 겨우, 원래의 ‘모카’처럼 행동할 수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아 계속 외면하려 해도 진실은 잔인하지, 아이러니하게도 신기사라는 자신의 다른 신분이, 진실을 계속 끌고와 대면시킨단 점에서 모카는, 그대로 아픔을 견디기만 했다. 이 힘 덕분에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할 수 있는 거라고 굳게 믿었고, 지휘사님 역시 그렇다고 다시 확신을 가지게 해 줬는데 왜 자기 자신을 죽이는 흉기가 되어버렸는지. 왜 자기 자신은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로 상황에 끌려다니기만 하는지.
세상에선 이런 감정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짝사랑이라 부른다던데
아니라고 빌고 싶었고
세상에선 이런 느낌을
괴로워서 미칠 것만 같았고
달콤하다고 하며 좋아하던데
당신에게 너무나 미안해져서
아, 당신이다.
정작 보고만 있을 때는 그렇게 괴롭지 않은데 왜,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테니 괴롭지 않은 걸까. 이런 생각이나 하면서 모카는 자기도 모르게 계속 계속 상대를 바라보았다. 멍 때리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하고, 모카 님? 이라며 누가 계속 부르자 그제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님? 그럼 지휘사님은 아니라는 이야긴데, 누구지. 하고 똑바로 바라보니 그가 바라보고 있었다. 일 났다, 모카의 머릿속에 피어오른 말은 이것 뿐이었다. 괜찮으세요? 전혀 괜찮지 않아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정신을 잡자, 속으로 심호흡을 몇 번 하고서야 속에서 말들을 겨우 끄집어내 가져올 수 있었다.
요즘 감기가 유행한다더니, 저도 무리해서 감기기운이 왔나 봐요.
어쩌다가 무리하신 거에요…, 저, 감기에 좋은 차를 알아요. 다음에 가져다 드릴게요.
제게 주셔도 괜찮은 거에요? 귀한 걸텐데…
그럼요. 모카 님이니까 드리는 거에요. 아프지 말라고, 모카님이 아프면 저도 슬퍼요.
머릿속에 지도를 그릴 수가 없다. 지금 무슨 대화를 하는 건지조차 파악할 수가 없어, 모카는 서 있는 것만으로도 겨우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대답은 하는 것 같은데, 당신이랑 대화라는 걸 하는 것 같은데 어떤 내용인지 전혀 들어오질 않는다. 이러다가 자신이 좋아한다고 말해 버려도 자신은 눈치채지 못 할 거라고, 그런 김에 확 말해보고 싶음에도 이상하지. 그 말만큼은 죽어라 자신의 중심에만 있으려고 해서 절대로 꺼낼 수가 없었다. 알고 있으니까. 이 사람은 자신과 같은 감정으로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으니 말할 수가 있나.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음에도, 이 하나만큼은 몸이 기억하고 있어서 절대 어길 수가 없는 모카였다.
좋아하나요?
뭘 좋아한다는 소리일까. 정신이 없으니 좋다고 대답하자. 싫다고 대답하는 것보다야 낫겠지.
네, 좋아해요. 아, 다행이다. 저만 좋아하는 줄 알고, 잘못된 상대를 좋아하고 있는 줄 알았어요.
무슨 소리지? 잘못된 상대? 사람을 좋아하냐는 소리였나?
아, 좋아한다는 게 혹시? 네, 알고 있었는데 모르는 척 하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야, 설마. 설마 내가 실언을 했겠어?
어… 다시 말할까요? 좋아해요, 그리고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어요. 모카 님.
기뻐요. 언제 말해주시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말해주셨네요!

안녕하세요. 중앙청의 앙투아네트예요. (*´╰╯`๓)♬
우선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중앙청과 함께 해주신 여러분에게 감사드려요.
우리 중앙청은 중앙청에 소속된 모든 신기사들에게 가능한 최대한의 안전과 그를 위한 지도를 제공해드리고 있습니다.
세상에 흑문이 출현하고 우리의 삶은 많이 달라졌어요.
얼마 전까지 일반인이었을 당신에게도 신기사라는 존재는 그리 특별하지 않을 거예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신기사들은 저마다의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어요.
특정 신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이라면 깜짝 놀랄만한 상황들도 많고요.
공포는 무지에서 나온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저희는 신기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 신기사들의 심적 부담을 줄여드리기 위해서 일종의 "지침서"를 제공해드리려고 해요.
당신이 언제든지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요.
※ 본 지침서를 외부(지휘사를 포함)에 유출 시 책임을 지게 될 수 있습니다.
※ 지침서는 어디까지나 사고를 줄이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니, 이 글을 읽고 특정 신기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이 드는 경우엔 중앙청에서 저를 찾아 주세요.
※ 그 외에도 여기에 적혀있지 않은 돌발 상황이 발생하였을 시엔 지휘사를 찾으세요. 대부분의 경우엔 전화를 거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1. 보름달이 세상을 훤히 비추는 밤. 당신은 계절에 상관없이 피어있는 한 사람의 벚꽃 나무를 발견하게 될 수 있어요.
만약 당신이 그에게 말을 건다면 그는 다정하고도 인자하게 웃으며 당신을 맞아 줄 겁니다.
중앙청에서도 그와의 접촉을 막지는 않습니다만 다음 사항은 숙지해주시길 부탁드릴게요.
그의 나무뿌리 사이의 빈 공간을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만약 당신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 공간을 보았을 때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고개를 들지 말고 그대로 땅을 바라보세요.
그리고 전술 단말기로 제게 도움을 요청하세요.
그가 당신의 상태를 걱정하고 도와주고 싶어 할 테지만 때로는 선의의 행동도 나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걸 알아주길 바라요.
2. 천식에게 세계의 원리에 관한 질문을 하지 마세요.
3. 붉은 눈의 여성이 당신에게 다가와,
"저는 언니가 만든 인형이에요. 밀랍으로 이루어진 제 몸과 팔다리에 죽은 영혼이 갇혀있죠. 당신 눈에도 제가 그렇게 보이나요?"
라고 묻는다면 긍정도 부정도 하지 마세요. 가까운 곳에 여성과 얼굴 생김새가 비슷한 인형이 당신들을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 거예요.
그를 찾아서 여성 앞에 드러내면 당신이 곤란해지는 일은 없어요.
4. 사람이 없는 한산한 시간대의 중앙청에선 고장이 아닌 이유로도 엘리베이터에 갇히게 될 수 있어요.
시간이 지나도 다음 층으로 이동하지 않는다거나 이미 지나온 층으로 되돌아간 느낌을 받는다면,
벽을 보며 울고 있는 메이드에게 말을 거세요.
그에게 당신이 휘말렸음을 알리고 지금 하는 일을 멈춰 달라고 부탁하세요.
엘리베이터는 다시 정상적으로 운행될 것입니다.
5. 기도하며 울부짖는 까만 손들을 피하세요. 절대 그것들과 눈이 마주쳐서는 안 돼요.
그러나 당신이 그것들과 눈을 마주쳐버렸다면 그 즉시 큰 소리로 해당 신기의 주인이나 지휘사를 부르세요.
신기의 보유자가 당신이나 지휘사를 인식하면 그것들은 손으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6. 항구도시의 바다 옆길을 걷다 보면 파도 속에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라는 소리가 들릴 수 있어요.
당신이 목소리를 따라 바다에 다가가면,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겠지만 당신은 그걸 사람으로 인식할 수 있을 거예요.
그가 있다는 확신이 든다면 바다를 향해 외쳐주세요. "돌아가세요. 여기 있으면 안 돼요."
그가 당신의 이름을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제게 당신의 대답을 막을 권리는 없지만, 모든 관계는 인사와 통성명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주시길 부탁드릴게요.
7. 제 동의 없이 방주에 들어가는 것을 금합니다.
행여라도 들어가게 되었을 경우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앙투아네트를 기다리세요.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당신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아요. 다만 그들은 고요를 사랑한답니다.
*
A: 얼마 전에 중앙청에 가입한 신기사야.
A: 근데 오늘 지침서라면서 이런 메일이 왔어. 솔직히 이상하게 느껴지는 내용이 많아서 메일 자체가 의심스러워.
앙투아네트의 이름을 빌리고 있긴 하지만 왜, 백조 같은 곳에선 중앙청도 해킹 가능하다는 소문이 있잖아.
죄다 도시 괴담 같은 내용에 설명도 두리뭉실하기도 하고. 외부에 유출하면 안 된다지만 신경 쓰여서 신기사 같은 사람들만 초대해봤어.
혹시 이 중에 저 지침서에 적혀있는 것들을 실제로 마주쳤거나 관련 내용을 자세히 들어본 사람 있어? 있으면 말해주라. 찝찝해서 그래.
H: 유출하지 말랬는데 받자마자 인터넷에 올리는 수준 봐라. 중앙청에 신고했다ㅋ
B: 말 예쁘게 하네. 8번 항목으로 니 인성 추가해도 될 듯ㅎㅎ
H: 넌 저기에 본인 얘기가 껴있어도 인터넷에 올릴 거냐?
B: 니 비설터는 것도 아닌데 뭔 상관
C: 조용히 해봐. 나 지금 5번 목격담 쓰는 중
(…)
C: 거의 다 써가
(…)
C: 다 됐다.
C: 내가 기도하는 까만 손들을 만나게 된 건, 드물게 개미 한 마리조차 없는 도심의 광장이었어.
그 애는 알록달록한 솜사탕을 손에 쥐고 그게 중요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지.
자신의 치마 아래에서 나와서 태양을 향해 양 손바닥을 비비거나 깍지를 끼고 간절하게 울부짖는 까만 손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어.
난 그것들에게 다가갔어. 웃겼거든. 웃음이 났어. 비극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을 들어봤을 거야. 유명하니까.
나는 그 까만 손들과 꽤 멀리 떨어진 위치에 있었고,
그래서인지 되지도 않는 태양 같은 것 따위에 간절하게 기도하는 그것들이 우스워 보였어.
재밌는 것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마음으로 나는 그것들에게 더 가까이 갔어. 그리고 분명 손의 형태일 터인 그것과 눈이 마주쳤어.
내 존재를 눈치챈 검은 손들이 순식간에 눈앞으로 모여들었어. 까만 손의 눈을 보았어. 그것은 거대한 짐승의 이빨이었어.
또한 인간의 혈관에 잠들고 있던 석유보다도 검은 것이었어.
그들을 좀 더 오래 보고 있으면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될 것 같아서 나는 지침서를 어겼어.
까만 손들이 칠흑 같은 어둠을 벌리고, 과거이자 미래의 가능성을 부르짖었어.
너네에겐 미안하지만 그게 무슨 내용인지는 전혀 기억이 안 나.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건, 그걸 듣는 순간에 고막 안쪽에서부터 예전에 느껴보았던, 찌르는 듯한 통각이 느껴졌다는 것.
찌르는 듯한 아픔이 녹아내리는 아픔으로 바뀌었을 때, '뒤를 돌아. ○○, 우리를 봐. 우리를 구해줘. 우린 여기에 있어.'라고 절규하는 목소리가 들렸다는 것.
나는 알 수 없는 슬픔과 공포와 아픔으로 인해 패닉에 빠져 비명을 질렀고, 그 애가 나를 눈치채고 뒤돌아보면서 검은 손들은 그 애의 치마 아래로 사라져버렸어.
기묘한 기시감을 남긴 채로.
C: 나는 그들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 동그라미 처리한 건 내 이름이야.
C: 닉네임이 아닌 쪽.
(…)
K: 나도 저 메일 받았어. 근데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어차피 임무 대부분은 지휘사랑 같이 가고 신기사끼리만 있을 일은 별로 없잖아.
A: 지휘사랑 같이 가는 게 왜?
K: 지휘사에게 말하면 안 된다고 그랬는데 지침서에는 무슨 일 생기면 지휘사를 부르라고 했잖아. 지휘사는 아무것도 몰라.
K: 지휘사 앞에선 이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거든.
A: 왜…?
K: 내가 어떻게 알겠어… 신기는 흑문과 연관이 있으니 혹시 모르지. 흑문 너머에 있는 무언가에게 지휘사가 특별한 존재일수도. 우리에게 그러한 것처럼.
(…)
D: 방주에 들어가 본 적 있어.
A: 어떻게?
D: 새벽에 숨어들어 갔어. 앙투아네트가 다른 앙투아네트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방주를 열어놓고 남은 서류들을 계속해서 정리하고 있는 틈을 타서.
H: 계속 ㄱㄱ
D: 처음에는 앙투아네트에게 들키면 혼날 거라는 생각에 무작정 앞으로 달리기만 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어.
지상에서 걷는 것과 물속에서 걷는 건 느낌이 다르잖아. 그런데 그 공간은 그 어느 것과도 느낌이 달랐어.
그 공간을 공기나 물 같은 무언가가 채우고 있긴 했을지조차 확신이 안 서.
D: 존재하는 것은 어둠뿐인 그런 곳에 그것은 있었어. 처음에는 거대한 건물이라고 생각했어.
개미와도 같은 작은 존재가 코끼리의 등을, 코끼리라는 하나의 동물의 신체 부위라고 바로 알긴 힘든 것처럼.
얼마 전에 시가지에 등장했던 레비아탄보다도 컸을까.
지구에서 가장 크다는 대왕고래를 닮았다고도 느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거는 고래라기보다는 금붕어에 가까운 형태를 띠고 있었는지도 몰라.
아주 하얗고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이 세상이 아닌 곳에서 사는 거대한 생물. 순간적으로 비명을 지르려고 하는 입을 누군가가 틀어막았어.
D: 누군지 추측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그래, 앙투아네트였어.
내가 진정한 걸 확인한 그는 검지손가락을 자신의 입술 가운데에 조용히 가져다 대면서 내게 침묵을 요구했어.
D: "조용히."
D: 낮고 작은 목소리로 그리 말하였는데 그 정도의 속삭임은 괜찮았나 봐. 그다음에는 뭐… 앙투아네트랑 방주를 빠져나갔지.
그리 혼나지는 않았지만… 혼나지 않아서 더 혼난 기분이야…
A: 앙투아네트한테 그게 뭔지 안 물어봤어…?
D: 물어봤어. 음… 말할까 말까 좀 고민되는데 그냥 쓸게.
방주의 어둠 속에서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앙투아네트에게 물었어. 저게 뭐냐고.
그러자 앙투아네트는 그것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미소 지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어.
D: "가여운 존재들이죠. 당신과 저처럼요."
D: 앙투아네트의 얼굴은 슬퍼 보였어. 입가엔 미소가 지어져 있었는데도.
D: 그게 계속 생각나서 마음이 아파.
D: 신기사와 신기는 도대체 얼마나 다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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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청의 화요일은 가장 바쁜 날이야.
보통 대외업무와 회의들은 지난주에 자료 취합과 정리를 해두고, 월요일에 마저 정리를 한 뒤에 화요일에 많은 일들이 이뤄지는 편이거든. 그래서 넌 고통스러운 대외 회의들을 간신히 마치고서 자리에 돌아와 엎드려 있었어. 햇빛은 따사롭고, 바람도 나쁘지 않고, 봄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날인데 앞에 중앙청에 틀어박혀서 일하고 있으니까. 의도하지 않은 직장인 생활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만, 이런 날에는 좋건 싫건 업무 외 생각이 스믈스믈 기어올라가는 편이지.
“허리에 좋지 않으니 일어나지.”
안화의 잔소리조차 딴짓의 시발점이 될 수 있는지라 넌 엎드린 채 고개만 돌려서 대답해.
“중앙청 로비 노래는 왜 레퀴엠일까.”
심지어 라크리모사. 눈물의 날. 고요하고 좋은 노래지만,
“히로가 선택한 곡이야.”
“그렇게 말하니 알거 같네.”
안화는 피식 웃으며 답해. “그 사실이, 그럴듯 한가?”
“히로 아니면 안화일까 싶었지.”
“어머, 저는 예외인가요?”
서류를 손에 들고서 둥둥 뜬 채로 웃으며 지나가는 앙투아네트. 안화는 뭐라 받아치려다 앙투아네트에게 넘어간 대화 화제를 그대로 이어가길 바라는 눈치야. 다시 화면과 서류에 집중하고 있어.
“앙투아네트라면 쇼팽 쪽일거 같아요.”
넌 앙투아네트에게 웃으며 대답해.
“맞아요, 저는 피아노곡이 좀 더 좋아서. 물론 그렇게까지 듣는 편은 아니지만요.”
“의외네요. 앙투아네트는 좀 더 클래식 곡들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유우토 씨의 연주회는 늘 찾아가고 듣는 편이긴 하지만...그렇게까지 즐긴다고 하긴 어려울 거 같아요. 저보단 더 좋아하시는 분들도 많고.”
앙투아네트는 그런 사람이야. 자신의 호오를 그다지 내세우지 않는 사람. 너는 이따금 의심하곤 해. 당신의 자아를. 언제나 자신보다 앞서있는 당신의 믿음과 세상을. 넌 언제나 한발짝 뒤였어.
“그래도 당신에게 찾아온 호의를 먼저 양보할 생각까진 하지 않길 바라는데.”
안화는 앙투아네트보다 한발짝 앞서있는 앙투아네트를 그렇게 지적해. 너도 동감해서 고개를 끄덕여.
“그건, 어쩔 수 없죠. 전 바쁘기도 하고, 저보다 더 즐길 수 있는 분이 계시지 않겠어요?”
안화와 너는 동시에 눈을 찡그려. 넌 엎드려있던 몸을 일으켜서 약간 볼멘소리를 해. 적어도 호의 앞에선 돌아볼줄 아는 당신이지만, 그뿐이긴 아니길 바라서.
“앞으로는 절대 양보하지 마세요.”
“간만에 지휘사의 말에 동의하게 되는군.”
넌 안화의 동의에 웃으며 반응하려고 하지만, 안화는 네 쪽을 보지도 않고서 대답했어. 눈은 여전히 모니터를 향한 채로 빠르게 손은 움직이고 있네. 어쩜 저렇게 변함없는 사람일까. 그래서 앙투아네트가 죽었을 때에도 저랬던 걸까.
“알았어요, 간만에 두 분의 의견이 일치하셨으니 저도 유념할게요. 두 분 앞에서는 일부러 조금 더 풀어진 척 하는 것도 방법이겠어요.”
라며 후후 웃는 앙투아네트.
“아, 그래서, 로비의 음악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눈물의 날을, 레퀴엠을 이야기하는 당신.
“아냐아냐, 좋긴한데, 곡 템포가 템포다보니 더 늘어지니까 그런거구...”
앙투아네트와의 간단한 잡담을 이어나가며, 너는 무거운 눈꺼풀을 조금씩 들어올리고 있어.
“불평할 에너지를 회의 내용 정리에 써주길 바란다. 빠르게 정리한다면 쉴 수 있는 시간은 더 늘어나는 법이야.”
내가 얼마나 열심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는지 안화가 알아? 속으로 생각하며 심술이 나는 너. 입을 삐죽이지만 별 다른 도리는 없어. 안화는 옳은 말만 하는 편이지. 앙투아네트가 쓰러진 뒤에도 우리 앞에선 조용한 사람이니까. 안화는 감정을 숨길 수 있어.
그 안의 깊이는 알 수 없을 지라도.
“그래도 피곤한 건 피곤한 거지.”
피로함에 하품을 길게 내뱉자, 건너편 자리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앙투아네트가 조용히 네 쪽으로 다가와. 서류를 한가득 들고 있는 채로, 다리 아래 공간의 일그러짐을 만들며 둥실 떠 있는 앙투아네트.
“요즘 따라 유독 피곤해하시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기억...때문에 문제가 있으시다거나, 혹은 중앙청 업무 문제라면 언제든지 저에게 말씀하셔도 괜찮으니까요. 물론 그 이상의 문제들도 언제나 환영이에요. 이를테면 유해화 문제나, 지휘사가 환력을 다 소모했을 때의 이야기도...지휘사님은 알아야할 일이니까요. 안은 잘 대해주던가요?”
안은 너무 잘 대해줘서 큰일인데,
“이대로 가다간 밥 먹는 것도 제 손으로 못하게 생겼어요. 내일 안이 절 떠나긴 하겠지만.”
이번 회차, 문제가 있네. 다시 해야할까? 7일까지 방에서 게임이나 할까?
“그럼 다른 문제가 있나요?”
앙투아네트의 면담은 언제나 자유롭게 가능한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네가 앙투아네트에게 선뜻 면담과 대화를 먼저 요청한 적은 없었어. 친절한 사람의 관대함 앞에서 사람은 언제나 작아지는 법이야. 어떤 사람이 그 앞에서 함부로 그럴 수 있겠어. 넌 얼굴을 짧게 찡그리고선 대답을 고민했어.
“문제가 있긴 하시군요.”
짧은 고민의 틈새에 자리잡은 불안을 알아채는 앙투아네트. 이렇게 되면 대답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기도 하다.
“부담을 주려는 건 아녜요. 하지만 말할 수 있다면, 언제든 좋으니까요. 제가 곁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아요. 그러니까 말해보세요.”
하긴 고작 7일 뿐이야.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도리가 없지. 고민을 털어놓는 수밖에.
“자리를 옮길까요?”
“그게 좋을 거 같아요.”
“안화, 잠시 다녀올게요.”
고개를 끄덕 하고선 다시 화면에만 집중하는 안화를 뒤로 하고서 둘은 사무실을 빠져나온다.
“요즘 꿈이 길어져요, 계속 길어진다고 해야하나?”
너는 너의 공포를 이야기해. 길어지는 꿈에 대해. 현실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지만, 발을 잘못 딛는 순간 거짓으로 떨어지는 꿈.
그건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인지, 현실과 구분하지 못하는 일에 대한 공포였는지 잘 모를 일이야.
“얼마나 길어지길래요?”
“지금도 꿈인 거 같아요. 분명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하루도 확인하고, 중앙청 업무도 완수했고, 앙투아네트가 죽을 때 카지와 함께 슬퍼했고, 안화한테도 혼났거든요, 분명. 아, 맞아, 그거 알아요? 와타리도 앙투아네트 곁을 지켰어요.”
분명 아까까지 안화와 함께 장난치던 순간도, 화요일의 바쁜 중앙청의 하루도,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안이 깨워주던 것도, 어제 있었던 사하무의 유해화도. 모두 꿈인가 싶어지니까. 그런 기분이 들면 너는 멍하니 돌아보게 되곤 해. 실패가 아무렇지 않아지니까. 죽은 이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에 잠겨 죽어가고 있을 뿐이니까. 그래서 넌 조용히 이야기해.
“가끔 너무 이렇게 풀어졌나 싶기도 해요. 꿈도 여유가 있어야 꾼다잖아요?”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는 지휘사님을 보니 또 괜찮으신 거 같네요.”
“그쵸? 꿈이 워낙 생각이 안나는 편이라 모르겠지만,
오히려 이렇게 생각이 잘 안나는 거 보면 그다지 악몽 같은, 이상한 꿈도 아니지 않았을까요?”
기껏해야 앙투아네트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꿈 정도였고.
"그래서 가끔은 눈 뜨기 싫을 때도 있어요. 눈 뜨면 출근해야하잖아요. 가끔 놀러나가는 꿈도 꾸고,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터를 탔다가 아래로 빠르게 떨어질때 이제 꿈에서 깨어날 때도 있었어요."
지속되는 꿈과 행복을 이야기하는 너. 앙투아네트는 웃으며 대답해.
“그런데 눈을 떠보면, 제가 죽어가던가요?
여전히 침대이던가요?”
앙투아네트는 침대에 누워 너를 올려다보며 물어. 롤러코스터의 추락은 여기에도 존재해.
너는 울면서 흐려진 눈으로 내려다보며 대답해. 중앙청의 가지런한 침대. 안화도, 카지도, 와타리도 자리를 떠났어. 슬픔 때문이겠지.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떠나고 부서진 너만이 남아있어. 꿈을 이야기하는 당신.
“앙투아네트...” 이건 꿈일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하셨어요? 즐거웠던 때라도 떠올랐나요?”
앙투아네트는 이런 와중에도 너를 위로하기 위한 말을 골라보았어. 어째서 그럴까. 꿈에서조차 친절한 그 사람은 죽어가는 와중에서도 언제나 자신보다 자신을 한걸음 뒤에 두고 앞서나가는 사람이야. 유리된 채로 존재하는 사람. 앙투아네트는 그런 사람.
“다른, 다른...선택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그런 고민은 다른 분들을 위해서 사용해주세요.”
어째서요?
“앙투아네트는 차라리, 앙투아네트로 남아야 했어요. 지금처럼 둘이 아니라. 자신을 두고서 자신을 평가할 수 있고,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자신이 남길 것을 떠올리는 당신이 아니여야 했어요.”
“하지만, 그게 저인걸요.”
침대의 시트만큼이나 옅은 미소를 간신히 지어보이는 당신. 너는 이 끔찍한 꿈 앞에서조차 모질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자신의 성품을 찢어버리고 싶어져. 이게 내가 원했던 나인가? 이게 네가 원했던 너라는 사실만은 자명하지.
“실패해야해요. 히로처럼.”
넌 호신용으로 구비되어 있던 구석의 총을 노려봐. 중앙청에 이런 게 있었던가? 아니면 꿈이라 존재하는 건가? 그도 아니라면 히로와 같은 자기 완결은 저 검은 물건에 존재하는 건가? 맥거핀이 아니라면 존재의 이유가 있겠지. 넌 생각의 틈새로 빨려들어가서 그 무기를 집어. 앙투아네트는 조용히 타일러.
“지휘사님, 아니에요. 틀렸어요. 이건 꿈이 아니니까요. 짧지만, 행복하진 않은 곳이야 말로 현실에 발 딛을 공간이에요. 이제 돌아가셔야 해요.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에겐? 너에겐? 아무도 없는데? 소용이 있나요? 의미가 있나요? 무수한 당신은 당신을 발판 삼아서 다음 날만을 떠올릴 뿐인데. 당신에겐 당신조차 미래를 위한 발판일 뿐인데. 당신에게 가장 무가치한 게 당신이라는 사실이 나의 절망일텐데.
“제가, 저는, 앙투아네트가, 없었는데.” 그러니 꿈이야.
당신은 다섯 번째의 날 앞에서 언제나 멈췄는데. 어째서 당신은 남아있는 거야. 그러니 꿈이야. 여기의 너에겐 지킬 와타리와 카지와 유우토도, 함께 싸워나갈 레나도, 버섯을 찾아다닐 도도도 없어. 혼자일 뿐이야.
“지휘사님!”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나는 깨어날 수 있어.”
“그건 추락일 뿐이에요!”
아니야, 비행이야.
“날개가 있다면 비행이야.”
손엔 무거운 무기가 하나. 히로의 자기완성을 성공한 그것이 너의 손에 있어. 손에 이미 하나인듯, 떨어지지 않는 채로 하나야. 이게 꿈이라면, 어차피 깨어나겠지. 길어지는 꿈이라면, 다시 악몽이 되겠지. 그렇지 않다면? 꿈이 아니라면?
“앙투아네트, 당신이 없다면, 이곳의 당신만이 없다면.” 의미가 없으니까.
너는 완결을 바라보
탕

[안화+남휘] Séduire
그의 이명은 [신의 두뇌]다.
Written by. Pisada
* 모형정원의 열쇠, 칠흑의 인과, 바람이 불 때에 대한 미약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영원한 7일의 도시 공포 합작 참여 글.
* 논커플링
중앙청은 흑문 사태가 발발하고 나서 6개월간 단기간에 왕성한 무력을 갖춘 조직이다. 헹정, 정치, 신기사 개개인의 무력, 일련의 사태에는 심지어 군대까지 동원할 수 있다. 항간에서 중앙청은 오만한 이름처럼 접경도시 안에 작은 왕국을 꾸렸다고 평가하지. 그렇지만 그들도 폄하할 수 없는 건 중앙청은 보유한 자원을 오로지 인명과 세계의 수복을 위해 사용한다는 점이다.
"지휘사, 제대로 듣고 있나?"
공식적인 업무 시간이 지나면 부드러워지던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 히로 이후 최초로 지휘사 수험 시험을 통과한 유일한 사내라고 하지만, 지휘사의 체력은 여전히 형편없다. 안화는 지친 기색이 완연한 지휘사를 깨웠다. 테이블 앞쪽으로 고개가 뚝 떨어지고 나서야 지휘사는 정신을 차렸다.
너도 슬슬 일에 적응되었으니 자세한 권력 구도를 알아둬라. 안화의 지시를 명분으로만 상사인 지휘사는 거부할 수 없었다. 사실상 통보에 가까운 말이었다. 근무가 끝나고도 숙소로 돌아가지 못하고 내내 일대일로 안화에게 과외를 받아야했다.
"그러니깐 안화나 앙투아네트는 중앙청이 무너져도 중앙청일거고, 히로는 아닐 거라는 소리잖아?"
"놀랍군, 네게 그 정도 직관이 있을 거라 여기지 않았는데."
안화는 고저 변화가 크지 않은 목소리로 여러가지를 말했다. 시나 책을 낭독하는 문인처럼 선명한 목소리 탓일까. 지휘사는 처음 듣는 내용들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기억을 전부 잃어서 알고 있을 리가 없는 일을 언젠간 겪어본 것처럼. 무심결에 자신이 흘린 말이 담은 내용에 놀란 지휘사와 달리 안화는 태연했다. 히로가 배신한 적은 없다. 오히려. 그는 이 모든 게 처음이 아닌 것처럼.
"안화, 넌 히로의 배신을 예상했지?"
안화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대답을 준비하기 위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다. 듣는 이의 반응을 살피는 눈이다. 마치 지휘사에게 되묻는 듯하다. 서로 안면을 튼 지 고작 일주일 조금 넘은 사람이다. 하물며 평소에 감정표현과 표정변화도 적다. 지휘사에게는 안화를 친근하게 여길 일은 솔직히 없었다. 퇴근하고 나서 붙잡혀 있는 이 시간도 버거울 따름이다. 여전히 안화가 무섭다. 그렇지만 안화가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익숙했다. 정말, 감당할 수 있겠냐는 최후의 배려.
"대답해줘, 안화."
안화의 환력은 언제나처럼 고요했다. 물성에 가까운 표정으로 변모한 표정. 지휘사는 그 표정에서 귀찮아하는 기색과 권태로움을 읽어냈다. 어느 순간부터는 머리가 아픈 일도. 소녀의 울음소리만 들리던 꿈도. 자신에게 향하던 이유 모를 원망도. 신기사들의 신뢰와 애정도 버거워지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흔들림 없이 뒷일을 제게 맡기고, 마지막 날까지 죽지 않았던 사내가.
안화였다.
아니다.
안화도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다.
신의 두뇌가 인지하는 세계는 단순히 일반인이 보는 시각과 아예 다를 거라며. 누군가가 말했다. 누구였지? 지휘사는 간신히 자신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고작 열흘이라는 기억은 누적된 기억들을 이겨낼 수 없었다. 이명이라도 들리면 좋을 텐데. 지휘사는 간절히 바란다. 온몸에 열이 뇌로 몰려 뇌가 녹아버릴 것 같은데도 안화의 목소리가 선명하다.
"정확히 말하면, 어느 순간부터 알고 있었지."
사내는 담담하게 세계의 비밀을 내뱉는다. 안화는 종국에는 암석 절벽을 깎아내는 파도같은 언어를 구사한다. 세계가 뒤엉키는 박자의 흐름. 흑문이 열리지 않지만 시공이 흔들리는 감각을 기민한 신기사들은 읽어낼 수 있다. 그렇지만 안화는 세계의 멸망을 앞당긴다. 신속정확. 업무는 제때 처리해야 한다.
"지휘사, 그때 너만 신을 알현한 게 아니었다."
안화가 말하는 그 순간은 어느 때일까? 지휘사는 방대한 기억을 대조하면서 이번 회차 윤회에서 안화가 세계의 구원이나 질서 회복에 힘을 크게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회색에 가까워진 연두색 눈동자가 구름 하나 없는 여름하늘 같은 눈동자를 쳐다본다. 새싹 같은 색깔과 달리 살아있지만 지쳐버린 눈동자다. 진실을 알게 되면 대부분이 미쳐버린다. 히로도. 이스카리오도. 지휘사도.
"이 대화가 몇 번째인지는 기억할 수 있나?"
안화에게 주어진 권한은 몇 없다. 그렇지만, 아이솔린은 공명정대한 신임으로 역할과 의무만큼 자유를 허락했다. 일주일. 지휘사는 일주일이 지나면 거시적인 운명을 결정하는 권한을 상실한다. 그 이후 모형정원은 지휘사의 선택이 만든 결과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남는지 오로지 기록할 뿐이다. 안화에게는 차라리 세계를 빠르게 초기화시키는 편이 편했다.
"신기사에게 부여되는 이름은 누가 정할까? 무수한 신기사 중에서 신화 속 신과 비유되는 신기사들도 있지만, 왜 신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이명을 부여받은 신기사는 극히 드물까. 그리고, 왜 내 이명이 신의 두뇌인지."
나즈막하게 들리는 안화의 목소리가 명확하게 인지되지 않았다. 지휘사가 세계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번 세계는 곧 멸망한다. 윤회를 촉발하는 조건은 지휘사의 죽음이다. 좀 더 명확한 조건은 지휘사가 세계를 포기하는 순간이다. 한 회차 모형 세계에서 지휘사가 어떤 가능성도 느끼지 못할 때, 모든 설정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수천만번 나와 만나는 동안 생각해본 적이 있어?"
어느 순간부터 극히 드문 확률이지만 아이솔린도 제거하지 못한 잔존율은 말썽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세라핌조차 관리자 직임을 포기했다. 아이솔린은 인간 기준에서는 무자비하겠지만, 권력자로서는 꽤나 공정했다. 기적, 고통, 절망, 행복을 동등하게 취급하며 인명을 숫자로도 제한하지 않을 뿐이다. 안화는 어느 순간부터 모든 일들을 기억하거나, 알아차리게 됐다. 아이솔린이 안화에게 '신의두뇌'라고 정해둔 건 처음부터 짜여진 일이었다. 그 즉후, 안화는 그저 해야할 일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처음 신을 알현한 순간에는 안화도 그 무자비함에 희열에 가까운 공포를 느꼈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 히로처럼 맹렬하게 홀려 불타오르기에는 그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다. 세계의 파멸은 예정되어 있으며, 무한한 윤회는 멸망을 유예시킬 뿐이다. 결국 어떤 기적도 없을 것이다. 신기사가 되어 신의두뇌라 불리기 이전부터 막연하게 짐작한 결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무려 신에게 확정받았다. 안화는 더는 무의미한 일에 에너지를 쏟지 않는다.
"걱정하지 말고, 언제나처럼 흑핵만 정화한다면 우리들의 정원은 아무런 문제없이 순환할 거다. 지휘사."
"너는 누구야?"
"나는 신의 두뇌지. 지휘사."
* 간단한 풀이 : 아이솔린이 등장한 곳에 씌여져있던 공식, 회차 리셋때마다 나오는 안내문구, 최초의 1회차 게임 인트로, 안화의 이명 [신의두뇌] : *신으로 비유되는 신기사와 달리 안화는 '신의'라는 소유격이 유일하게 붙는다, 인게임 내에서 마치 컴퓨터같이 철저하다는 안화에 대한 평가 > 그렇다면 안화가 통속의 뇌를 관리하는 내부적 관리자가 아닐까? 라고 쓰게 된 글. 본의아니게 멘탈이 나가버린 남휘사에게는 미안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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