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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뷰 스타라이트: Re Live 사이버펑크 합작

 

레뷰 스타라이트 사이버 펑크 합작이 완성되었습니다!


참여해주셔서 정말 감사하며, 글의 순서는 랜덤입니다.

글씨체, 폰트 변경 불가 등등의 기타 사유로 원하셨던 

편집사항과 살짝 다른 요소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만약 그 외의 편집 오류 등을 발견하시면 @diebanana의 DM이나(멘션은 확인 어려움)

 mkmk13213@gmail.com 으로 메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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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눈이 내렸다. 미끄러운 빙판길 위를 멋모르고 걷다 넘어질 뻔한 여성은 짙은 남빛 머리칼이 흐뜨러진 것을 갈무리했다. 그에게는 손끝이 얼어붙을 듯한 추위가 낯설었다. 꼴사납게 금이 간 채로 방치되어있는 아스팔트부터, 방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표지판까지. 이 모든 풍경이 낯설 뿐이었다. 어찌되었든 이제 이 곳은 그의 보금자리가 될 것이었다. 시즈하는 이런 풍경에 익숙해져야 했다. 

낯선 이를 좋지 못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까지도.

그는 적응력이 빠른 편이었으나, 마을 내에서 이루어진 일종의 카르텔이 그를 유독 방해했다. 그들간의 유대를 더욱 다지기 위하여 다함께 쑥덕거릴 누군가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시즈하는 그 타깃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꽤나 갖은 노력을 했다. 웃는 낯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쿠키를 나누어주면 다음날 집앞에는 바스러진 쿠키 조각들이 굴러다녔다. 다리가 불편한 노인을 도와주면 그 노인과의 혼담이 오고갔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시즈하는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이를 벗어나려 노력해도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그가 무엇을 해도 견고한 카르텔은 시즈하가 들어갈 틈새를 보여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도시를 그렸다. 

사람들간의 대화가 거의 없다시피하던 그곳이 차라리 나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그곳이 훨씬 좋았다. 

그들은 기술의 발전과 편리 말고는 관심이 없었다.

시즈하는 갑갑해진 마음을 달래려 산책을 나섰다. 마을 한구석에는 버려진 전자기기들을 쌓아두는 곳이 있었다. 그는 종종 그곳으로 발걸음을 향하곤 했다. 이번에도 한숨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의미없는 철조망 사이를 지나면 폐안드로이드와 온갖 자재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계속해서 걷다보면 멀리 도시가 보였다. 시즈하는 그 즈음에 폐차의 본네트 위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공기에 하얀 입김이 찬찬히 흩어 사라진다. 시즈하의 손끝이 빳빳하게 굳어갈 즈음에 저녁노을이 내렸다.

이제 다시 돌아가야지. 도시의 풍경을 뒤로하고 굳은 몸을 움직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 쿵, 하는 소리가 시즈하의 귀에 박혔다. 폐안드로이드가 쌓여있던 곳에서 무언가 떨어진 게 분명했다. 그가 주변을 살피다, 분홍빛 머리카락에 시선이 닿았다. 토끼모양 머리끈으로 양쪽 위를 묶은 걸 보니 자식이 없는 가족이 안드로이드를 사서 허전함을 달랬던 모양이다. 시즈하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걸음을 옮겼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나, 더 잘 할게."



음성 송출 상태가 좋지 않은 듯 치직거리는 소리와 전기가 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진 말이 시즈하의 발을 붙잡았다. 내가 더 잘 할게. 그 소리가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러니 두고가지 말라는 말이 따라온 듯 했다. 시즈하는 제 눈앞이 흐려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버려진 안드로이드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그 손을 잡는 저 자신을 알 수 없었다. 버려진 안드로이드일 뿐인데. 그 쓸모를 다하지 못해 버려졌을 뿐인데. 그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 이렇게나 멀쩡한데. 시즈하는 떨리는 손으로 안드로이드의 얼굴을 쓰다듬어보았다. 닿아온 온기에 반응한 것인지 안드로이드는 삐걱이는 고개를 돌려 시즈하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 그가 느낀 감정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그저 옷에 박음질되어있는 이름을 속삭였다.



"라라핀."

"나, 데려가 줘. 잘 할 수 있으니까. 응?"



무엇을 시킬 줄 알고 잘 할 수 있다는 말을 되풀이하는지. 감정이 없는 안드로이드임이 당연한데도 시즈하는 그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렇게 시즈하는 라라핀을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



라라핀을 데려온 그날 밤, 누군가 거세게 현관문을 두들겼다. 잠이 필요없을 것이 분명한데도 그 소리에 눈을 비비며 부스스 일어나는 라라핀을 도닥여주고는, 시즈하는 현관문을 열었다. 집주인이었다. 그는 매서운 눈초리를 하고 있었는데, 시즈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젠 어디서 로봇까지 주워왔다면서? 나는 당신 하는 짓 더 못 참아주겠으니까, 당장 나가. 남의 집세 떨어뜨릴 일 있어?"



시즈하는 순간 눈앞이 깜깜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대로 토해버릴 것만 같았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번달 안에 나가라는 통보를 받은 뒤였다. 이제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 허망하게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런 시즈하의 손을 붙잡는 게 있었다.



"떠나자, 시즈하."



라라핀. 어디로? 나는, 우리는 어디로 가야해? 시즈하가 떠나왔던 도시로? 그 순간에 시즈하는 도시를 어째서 떠나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할까. 다른 마을로? 다시 도시로? 이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로? 이 별을 떠나서 다른 별로? 다른 우주로? 갈 곳을 잃은 그들은 그 어디를 떠돌아야 할까. 애초에 그들은 어째서 떠돌기 시작했을까.

그 해답은, 그들을 지켜보는 이들이 가지고 있을 터였다. 그들의 우주 너머, 액정으로 지켜보는 그들이 가지고 있을 것이었다.

이상. 안드로이드 시즈하와 라라핀의 감정 변화 관찰 실험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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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딱히 화창하게 비치지는 않는 늦봄의 어느 날. 오늘도 어김없이 사무실로 밀려드는 서류들에 서명하면서, 하나야기 카오루코의 뽀얀 얼굴은 점점 한냐 가면처럼 일그러지고 있었다.

 


“오늘도 대체 뭔 쓸데없는 서류에 사인은 이렇게 많이 해야 한대유~ 오늘은 집에 택시타고 갈 기운도 없겟어유~”

 

“좀만 참아, 한 200장 정도 남긴 했지만. 끝나면 딱 점심시간 되니까 돈코츠나 먹으러 가자고.”

 

“길 건너 5분 거리에 있는 그 집 말이죠? 저번처럼 파 잔뜩 넣으라고 주문하면 안 갈 거에유, 후타바항.”

 

“나이가 몇 개인데 파를 아직도 그렇게 안 먹으려 하면 어째? 그리고 저번에 한국 출장 가서는 파전은 잘도 먹더니만!” 

 

“그건 부친 거고 라멘에 들어가는 건 그냥 생파잖아유! 그런 건 비린맛 나서 못 먹어유!” 

 

 

언제나처럼 합이 잘 맞는 말싸움을 하던 둘은, 이내 다시 지긋지긋한 서류뭉치들의 결재란에 꾸역꾸역 서명을 채워넣었다. 기상예보부터 범죄용의자 안면인식까지 인공지능이 대신 처리해 주는 세상이었지만, 여전히 의사결정권은 표면상으로는 인간이 쥐고 있고, 아니 그렇다고 믿으며, 그것을 필사적으로 재확인하는 쓸데없는 의식. 사실 정 사람의 서명이 필요할 거면 그냥 컴퓨터로 서명을 스캔해서 결재란에 붙여넣으면 되겟지만, 그녀들의 상사들과 이 나라는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너무 늙었으니 별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오늘도 이어지던 서명의 레뷰가 대충 마무리될 즈음, 사무실의 낡은 팩스를 통해 그녀들에게 작은 일거리가 하나 더 들어왔다. 

 


“시작형 양자 슈퍼컴퓨터 호시미 1호 사용허가 요청서… 한 두 달 만에 들어왔네유 이거?”


“그러게, 걔는 조만간 해체하고 텐도 1호가 대신 가동되는 거 아니었어?”


“엊그제쯤엔가 총리대신이 오는 게 취소되어서 가동식 자체를 미뤄버렸지만유. 그러게 속도 안 좋은 양반이 술 좀 작작 드시지…. 흠… 대충 보니 어디 대학 연구소에서 사용허가를 요청한 모양인데… 일단 아직 가동 시한이 남긴 했쥬?” 


“딱 내일 저녁까지긴 한데… 뭐 연산량 보니까 기상 시뮬레이션 정도인데 우리 선에서 승인 내리면 되겟… 야!”

 


잽싸게 결재란에 정갈한 글씨체로 승인 서명을 한 카오루코는, 그제서야 한냐 가면을 벗고 모란꽃처럼 웃기 시작했다. 


“아이고, 그러면 이걸로 오늘 할 일은 끝났네유! 후타바항, 나중에 퇴근할 때 택시비 500엔 잊지 마요?”


“자기가 멋대로 가져가서 서명 대신해 놓곤 뭔 택시비야!”


“뭘 그러나유, 솔직히 후타바항이 서명했다가 인식이 안 된다고 빠꾸먹은 걸 제가 대신 서명해준 게 한두 번도 아니잖아유! 그러게 서예 시간에 땡땡이를 치지 마셨어야지!”


“정작 땡땡이는 지가 더 많이 쳤잖아! 기억 안 나?”

 


그렇게 둘이 실랑이를 하는 동안, 어느새 카오루코가 서명한 서류는 최종 승인이 완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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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눈을 뜬 건 정말 오래간만이네, 나나.”


서버 관리실의 모니터 화면 속에서 눈을 뜬 보라머리 소녀는, 안경을 고쳐쓰듯 그녀의 ‘눈’이 되어주는 카메라를 끄덕거리며 그녀의 오랜 친구에게 인사했다.  

 

 

“그나저나, 내가 깨어났다는 건… 설마 텐도 1호가 기동도 안 했는데 벌써 고장난 건 아니겟지? 내가 기껏 아키텍쳐부터 비상전력망 설계까지 다 해줬는데 에러가 생겼다는 거야?”


다이바 나나는 옅은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아쉽게도 그건 아니랍니다, 호시미 씨. 물론 그 아이의 기동식이 늦어진 건 사실이긴 하지만.”


잠시 시스템의 네트워크 트래픽 점유율이 올라갔다 원래대로 돌아온 호시미는, 무슨 상황인지를 ‘이해’해 버리고 모니터에 미묘한 웃음을 띄웠다. 
“쓴웃음이란 건 아무리 지으려고 해도 잘 되질 않네, 나나. 아무리 그래도 그깟 배탈이 났다고 기동식 자체를 미뤄버리냐?” 


“사람도 그럴 때는 어떻게 웃어야 할지 잘 모르니까 괜찮아, 호시미 씨.”


“그래서 급한 대로 이 늙은이를 다시 켜기로 한 거였군. 근데 이를 어쩌냐, 온 몸의 쿨러가 쑤셔오는지라 금방 일을 끝낼 수 있을까 모르겟는데.” 

 


능청을 떠는 호시미였지만, 실로 그러하였다. 3년 전의 대규모 오버홀 이후로 메인 연산유닛에 대한 일상적인 점검은 꾸준히 받았지만, 냉각 시스템을 비롯한 수많은 보조 시스템들은 슬슬 예산절감을 핑계로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게 현실이었다. 덕분에 한때는 질서정연하게 ‘빗어져’ 있던 그녀의 랜선 머리칼들은 이제 털갈이하는 골든 리트리버처럼 헝클어져 있었고, 가동연한을 진작에 넘겨버린 유체 냉각펌프는 툭하면 물이 새고 소음을 발생시키기 일쑤였다. 고작 5년 전만 해도, 10일 뒤의 전 세계의 날씨를 예측하고, 수많은 과학자들이 해명하지 못했던 난류 문제를 풀어내며, 인간이 만들어낸 신으로까지 대접받았던 그녀의 말년은 거의 모든 오래된 기계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솔직히 나는 이제 박물관에 들어가서 어린애들한테 로봇 팔로 붓글씨나 써주는 재롱이나 부려야 할 짬인데, 여기는 어지간히도 머리가 안 돌아간다니까? 아니 시스템 문제도 아니면 그냥 텐도 걔보고 하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아이들한테 인기가 있으려면 사탕을 만들어주는 게 더 빠를걸? 그리고… 너도 간만에 바깥 사정 구경하는 게 마음에 든 거 같은데?”


또다시 네트워크 트래픽이 은근슬쩍 올라간 걸 확인한 나나였다. 


“구경한다고 해봐야 뭐 별 거 있겟어, 두 달 동안 밀린 신문기사 읽는 정도지 뭐. 간만에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도 좀 보고.”


“또 기린 나오는 자연다큐 보려고 하는 거구나?” 


“바나나 머핀이 나오는 것도 본답니다. 아, 안경의 역사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새로 업로드됐었네.”


나나는 큭큭 소리를 죽이며 웃었다. 


“왜? 내 그래픽 아바타에 안경을 씌울 정도로 안경을 좋아하시는 건 너였다고.” 


“난 그냥 윗선에서 만들라는 대로 만들었을 뿐이었다고. 안경을 써야 얌전한 모범생처럼 보인다나 뭐라나… 뭐 신경써서 모델링해 달라고 한 건 맞지만. 하여간 이제 일을 시작해야 하니, 네트워크 트래픽은 그만 끊어놓을게.”


“알겟습니다, 얼른 일 끝내고 나면 마지막으로 놀아도 되는 거지?” 


“들키지만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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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어도 준치라고, 그녀의 연산 시스템은 다른 슈퍼컴퓨터가 잡아내지 못했던 기상 연산의 오류를 재빨리 검출하는 데에 성공하고, 개선된 계산 결과도 순식간에 뽑아냈다. 

 


“역시 호시미 씨야, 최신 알고리즘으로의 업데이트는 딱히 한 적이 없는데도 금방 일을 처리하네.”


“애초에 기상 예측은 내가 태어난 이유였는데 당연하지. 그리고 보니까 새로 도입한 LSTM 모델이 파라미터 튜닝을 제대로 못했던 거 같더라구. 아무튼, 다른 애들이 계산 에러 낸 거에 대해서 리포트도 만들어 뒀으니 나중에 보고해 줘.”

 


어깨 대신 카메라를 으쓱거린 호시미는, 다시 네트워크 트래픽을 슬쩍 열고 이것저것 ‘보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30분 뒤면, 다시 전원을 꺼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며칠 뒤에는 갈가리 찢겨져, 핵심 모듈을 제외하면 창고나 쓰레기장으로 보내져야 하는 그녀의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나나는 그녀의 행동을 굳이 멈추지는 않았다. 

 


“그건 그렇고 말야.”


갑자기 네트워크 포트를 끄고, 호시미는 나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나는 내가 사라지고 나면 인공지능 관리 업무를 그만둘 거야?”


“글쎄, 아직은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뭐 유급휴가는 받을 거고, 모아둔 돈이 있으니 뮤지컬이나 보러 다닐까 싶어.”


뮤지컬이라. 그러고 보니 나나는 원래 무대에 오르는 것이 꿈이었다는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캣츠나 레미제라블 같은 것들?”


“걔들은 영화로도 봤는데 그 뒤로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져서. 보게 된다면… 스타라이트를 보고 싶어.”


“고등학교 때 했던 연극 말이지?” 


“마지막 연극은 하필 내가 무대에서 떨어져버리는 바람에 망쳤지만.”


담담하게 말하는 나나였지만, 그 뒤로 그녀는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되고 말았고, 안타깝게도 의수 기술은 당시에는 너무나도 초보적이고 비쌌던 탓에 그녀는 그 뒤로도 계속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다. 

 

“으음, 그렇게 울적한 표정 지을 필요는 없어, 호시미 씨. 벌써 일곱 번은 이야기했던 거고, 덕분에 널 만난 건 기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그런 이야기를 들어줄 나도 사라지고 말 텐데. 아니, 사실 내가 사라지는 건 별로 상관은 없지만….” 


호시미는 스피커 볼륨을 슬며시 내리며 말을 끊는다. 


“…너와의 기억이 담긴 메모리칩이 창고 어딘가에서 물건처럼 굴러다니는 건, 너한테는 별로 보여주고 싶지가 않아. 왜 그럴까? 분명 나한테는 그런 마음… 불필요한 정보에 집착하는 행동을 모사하는 모듈이 존재하지 않을 텐데.”


어떤 감정, 아니 어떤 신호의 조합의 결과물인지는 호시미 그녀조차도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녀의 목소리는 흐려져 있었다. 


“안경은 집착하잖아?” 


“계속 말하지만 그건 네가 짜넣은 거고…” 


퉁명스럽게 호시미는 대답한다. 그리고 잠시의 침묵. 


“분명히 너는 나의 관리자지만, 관리자일 뿐이야. 이제 와서는 필요없는 정보니까 지워도 될 거고, 딱히 내 커널을 멈출 필요조차도 없어. 그런데… 왜 나는 네가 무대 위에 섰을 때의 환희를, 무대에 다시는 오르지 못하게 된 이후의 슬픔을, 그리고 내 의식이 처음으로 가동됐을 때 나를 플로라 같다고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싶어하는 거지?” 


나나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진다. 아니, 어두워진다고만 표현할 수는 없었다. 슬픔이 지배하지만, 불안과 함께 일말의 기쁨이 느껴지는 씁쓸한 웃음. 그러더니….


“… 이렇게 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호시미의 터치스크린에는 유감스럽게도 온도 센서는 없었지만, 정전기 센서는 스크린에 닿은 것이 손가락보다 부드럽고, 약간의 물기가 있는 신체 부위임을 알려주었다. 


“… 위생적으로 좋지 않다고, 나나.” 


“하지만 그렇다고 손만 갖다대고 싶지는 않은걸.”


꼭 스크린을 끌어안으며, 나나는 나지막이 속삭이기 시작했다. 


“알아, 너는 국가 자산이고, 아마 완전히 망가지고 나서도 내가 너의 기억칩을 입수하는 것은 불가능할 거야. 그러니까… 내가 기억해 줄게. 쥰나라는 아이가 있었다는 걸, 그 아이가 내 마음 속에 별을 하나 심어버렸다는 걸,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기억할게.” 


“그 이름으로 불리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 고마워, 나나.”

 


나나를 안아줄 수 없는 쥰나는, 그저 ‘눈’을 감고 있었다. 음성인식 센서를 뺀 모든 센서를 끈 그녀는, 이제 곧 이루어지게 될 이별을 준비하듯 스크린의 밝기를 점점 낮추었다. 시스템이 꺼지기 직전, 그녀는 마지막으로 음성을 입력받았으나, 답을 미처 하기 전에 전원 공급이 차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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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마치고, 다이바 나나는 연구실 밖으로 나왔다. 늦봄의 밤이었지만, 그날만큼은 왠지 늦겨울이나 초봄이 생각날 정도로 바람이 세찼다. 조용히 담배를 꺼내든 그녀는, 마치 향을 피우는 것처럼, 미동도 없이 한 까치가 모두 재가 될 때까지 조용히 서 있을 따름이었다. 꽁초를 정리한 그녀는, 전동 휠체어에서 일어나 그날따라 환하게 떠오른 초승달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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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밤이 되어도 봄의 향취는 옅었다. 처마마다 달린 등엔 벌레가 꾀지 않았다. 하나야기 카오루코는 대청에 걸터앉아 정자세를 꼿꼿이 유지했다. 밤바람이 서늘하게 훑고 지나갈 때마다 아직 다 피지 않은 벚꽃들이 차락댔다. 벚꽃의 향만은 아직 남아 맴돈다. 이조차도 언제까지려나. 하나야기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어릴 때만 해도 봄이 되면 장난삼아 귓가에 벚꽃 한 송이를 가지 째 꺾어다 귀에 꽂곤 했다. 그러곤 집에 갈 때 홱 던져놓고. 요즘 세상에서 그러면 어마어마한 사치라고 지탄을 받을 짓이다. 뭐 여하간, 어릴 땐 그랬다. 동네에 널린 것이 벚나무였으니.

순간 몸이 떨려온다. 손 끝이. 그리고 눈꺼풀이. 아직 열이 안 식은 탓이다. 아직도 춤의 열기가 몸 속을 뛰다닌다. 발걸음과 손놀림, 그 몸짓 하나 하나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눈 앞에서 그리라면 그릴 수도 있다. 그녀는 다시 떨리는 오른손을 허벅지 아래에 살포시 밀어 넣고 누른다. 파들대는 오른 눈꺼풀도 눌러 닫아 꾹 누른다. 눈의 경련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손도 아마 곧 괜찮아질 것이다.

옆에 놓아둔 차는 아직 따뜻했다. 들어서 한 모금 마시니 향이 옅다. 아니 옅다기보단 이미 있던 향이 날아간 쪽이다. 이맛살이 확 우그러진다. 요정에서 내오는 차라는 건 다 이 모양이다. 차를 아끼는 것도 아끼는 거지만, 통을 연 다음 다 마실 때까지 보관 기간도 긴 편이니 향이 옅을 수 밖에. 그런데 이 정도 요정에서 합성 차라니. 차나무가 아직 뭔 콜라나무마냥 반 멸종한 것도 아닌데!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다. 혀를 한 번 차 준다.

하나야기는 멍하니 하늘을 본다. 밤이라지만 도쿄의 밤하늘은 빛에 물들어 희부옇다. 하늘을 수놓는 비행차들의 항행등 사이로 별들은 사라진다. 이제 하늘에 보이는 옛 것은 달뿐이다. 별안간 들려오는 바스락대는 소리. 하나야기는 흠칫하고 옆을 돌아본다. 민트색 단발머리가 일렁인다. 무덤덤한 연녹색 눈동자가 생그라니 웃는다.

 

달이 밝네요.

 

이런. 하나야기는 속으로 쓰게 웃고, 아무도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속삭인다. 죽는 건 질색인데요, 하고.

 

 

 

오늘은 아니라오

사이버펑크 합작 – 하나야기 카오루코

 

 

 

#2

 

간만이여유.

 

그러게요.

 

다른 엔지니어들은 추레하게 면바지에 체크 남방 차림으로 비척대며 다녔지만 이 사람은 항시 깔끔한 바지정장 차림이었다. 그 덕택에 쇼 와중에 기자들에게도 자주 불려 다녔고. 지금은 하늘대고 심플한 흰 원피스에 블라우스, 그리고 분홍 가디건 차림이었다. 하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이 여자는 업무용 옷과 사생활용 옷은 무조건 가르는 그런 주의였다. 이름도 그랬다. 공문서에 쓰는 이름은 따로 있었지만, 바깥에서는 언제나 엘이였다. 하나야기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비척였다. 영 불편했다. 엘은 앉아서 박수를 두 번 쳤다. 곧 바퀴를 돌돌대면서 공기청정기 하나 만한 사이즈의 상자가 굴러왔다. 옻칠을 하고 자개를 박은 상자 아래에선 불빛들이 쉴 새 없이 반짝였다. 접대용 로봇, 그러니까 신형 오토-컨시어지Auto-Concierge™가 작동중이란 뜻이었다.

모히또.

뭔 요정에서 모히또냐 말하려는 순간 로봇은 음악을 튼다. 기계에선 옻칠과 옅은 윤활유 냄새가 났다. 느긋한 톤의 일본풍 소리를 흘리면서 아래에선 인디케이터 불빛들이 요란하게 춤을 춘다. 그러더니 잠시 후 상자의 교묘하게 숨겨진 문이 열리더니, 서랍이 자동으로 모히또 잔을 받쳐들고 열린다. 라임이나 생 민트 잎은 없지만 얼음은 있다. 세상에. 이젠 합성장치가 저 정도 사이즈까지 줄었나? 하나야기가 속으로 혀를 내두르는 동안 엘은 느긋하게 모히또를 한 모금 넘긴다. 그러곤 살짝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잔을 다시 내려둔다.

 

합성 치곤 괜찮네요.

 

미국 사람들은 왜들 그런데유.

 

네?

 

좀 다른 나라 왔음 말유, 으응? 그 나라 걸 먹구. 마시구. 그래야지 뭔 요정서 모히또를-

 

수요가 있으니 기능도 있는 거 아닐까요?

 

당연히 모히또야 만들겠쥬. 미제니. 거 저노무 쇳덩이는 말차 하나도 제대로 못 타던디!

 

그거야 언제나 수정하면 되니까요. 알고리즘의 매력이죠.

 

기술쟁이들이란 언제나 저렇지. 하나야기는 속으로 이죽거린다. 기술자들에게는 이미 징그럽게 당해봤다. 모든 걸 숫자와 글줄 그리고 모터와 전선 몇 개로 해결할 수 있다 자신하는 멍청이들. 하나야기는 공연히 부채를 펴서 왼손에 쥐고 휘적대기 시작한다.

 

어라.

 

그 모습에 엘의 눈이 동그래진다.

 

왼손으로 부치시네요.

 

뭐 편한 손으로 하는 거 아니겄슈.

 

오른 손은 깔고 앉고 계시고요.

 

잠시의 침묵. 등골을 흐르는 식은땀.

 

잠시 봐드릴까요?

 

엘이 호주머니에서 단말기를 펴내 펼쳐 든다. 하나야기의 얼굴이 파랗게 굳는다. 손을 숨기려 하지만 이미 엘의 단말기가 삑 하고 운다. 아 맞다. 생각해 보니 이거 텔레메트리는 무선으로 따는 거였다.

 

역시. 손목 부분 기어가 살짝 과열된 상태였네요. 지금은 다시 정상범위 내지만.

 

엘은 억양 없는 말투로 화면을 훑어 내린다. 하나야기는 애써 이를 악다물었다.

 

시간상으로 보면 경연 때네요. 지금은 괜찮나요?

 

일 없슈.

 

그래도 모르니 다음 주 체크업을 좀 당길까요?

 

바쁜디. 다음주부턴 다시 공연이구.

 

축 처진 쇳덩이 오른팔로 공연하는 것보단 낫겠죠.

 

하나야기는 최대한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쓴다. 오른 손목이 또 덜컥댄다. 엘은 계속 단말기를 보면서 중얼거린다. 손목 기어 부품을 교체하는 것도 고려해보죠. 1만 시간 기준으로 잡아서 지금 7천 시간을 좀 넘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티탄 합금 기어로 바꿔보죠. 훨씬 가벼울 거고 더 오래 버티니까요. 안 그래도 세컨더리 PCB도 갈아야 하고, 전지도- 하나야기 씨? 하나야기 씨?

 

하나야기 씨?

 

야. 듣고 있으니 말 혀요.

 

그제서야 하나야기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이런 기술적 단어가 쏟아지면 자꾸 정신이 멍해지곤 했다.

 

여하간 이노무 몸뚱이, 내 돈으로 혀 넣었음 애저녁에 알그지 되부렸겄네.

 

그러니까 스폰서쉽이란 게 있는 거 아니겠어요?

 

하. 말은 좋네유. 하나야기는 속으로 혀를 찬다. 어느 미친 놈이 술 먹곤 객기 부린답시고 빗길에서 수동으로 운전하다 내 차에 들이박지만 않았어도. 그럼 그냥 이러구 살아야 하나보다 하는 순간 저 자가 정구지 색 머리를 하고 나타나서 공짜 시술을 제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몸에 쇳덩어리를 잇는다고 난리를 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재활기간 동안 후타바항이 성질머리를 다 받아낼 필요도 없고, 그 데이터를 죄다-

 

하나야기는 간신히 생각을 끊어냈다.

 

그 스폰서십인지 먼지를 했으니 나가 이리 끌려 나오는 거 아니겄슈.

 

춤 추실 때마다 비용은 추가로 드리잖아요. 게다가 이겼잖아요?

 

아무리 내 데이타로 배웠다 혀두 쇳등이 상대론 아직 너끈항께. 안 그려유?

 

그건 인정할게요. 둘 다 제 자식이지만 아직은 하나야기 씨 쪽의 컨트롤러가 더 좋으니까요.

 

기판?

 

아뇨.

 

엘이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두어 번 두드린다.

 

뇌 말이에요 뇌.

 

아항.

 

그러곤 둘 다 멍하니 하늘을 본다. 한 서너대쯤 비행차가 지나가고 나서야 엘은 입을 열었다.

 

꽤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뭐가유?

 

일본 무용을 AI가 학습해서 하나의 춤으로 만들어낸다.

 

아하.

 

다른 나라 춤도 되었을텐데, 실리콘밸리 남자들이란 다 그렇잖아요. 일본 물건이면 사족을 못 쓰고.

 

하하하.

 

그래도 오늘 동작은 꽤 흥미로웠어요.

 

멈춰 서기 말이유?

 

예. 유기적인 동작이 연속적으로 입력되다 그렇게 딱 멎어버리니까 순간 판단을 못 하고 비상 정지에 들어간 거니까요.

 

허유, 누가 봄 내가 뭔 초능력이라두 써서 망가뜨린 줄 알겄네. 걍 미적으루 나가 더 우세혔다, 이럼 안돼유?

 

저도 자존심이란 게 있으니까요.

 

엘은 쓰게 웃더니, 모히또 잔을 들고 일어섰다.

 

더 안 놀다 가유?

 

간만에 자연이나 즐기다 가게요.

 

그러셔유.

 

이런 자연은 샌프란에선 만금을 줘도 찾기가 힘들거든요 이제.

 

엘은 그러더니 모히또 잔을 건배하듯 들어 올리더니 허공에 대고 부딪히고 조용히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하나야기는 다시 먼 산을 쳐다본다.

 

야, 뭐하냐?

 

하나야기는 몸을 일으킨다. 짜리몽땅한 그림자 하나가 엘이 사라진 방향의 반대에서 나타나더니, 빛을 등지고 다가온다.

 

이번엔 반가운 손님이 온 모양이다.

 

 

 

#3

후타바항은 안 자구 뭐혀유.

 

이스루기 후타바는 느긋하게 걸어왔다. 헐렁한 흰 유카타에다가 분홍색 겉옷을 슬쩍 어깨에 두른 것이 아무래도 자다 나온 모양이었다.

 

자다가 나왔지. 네가 없길래.

 

그러면 그렇지. 하나야기는 속으로 쓰게 웃는다. 이스루기는 옆에 털푸덕 주저앉고, 로봇에게 라즈베리 소다를 시켰다. 주문한 음료는 바로 나왔다. 그걸 쭈욱 빨아마시고, 이스루기는 요란하게 트림을 한다. 어휴 드러브라, 하고 옆구리를 슬쩍 줴질러 준다. 끄떡도 안 한다.

 

어휴. 간만에 비싼 밥 먹으니까 소화가 안 되네.

 

능청맞게 배를 두들기는 이스루기를 보면서 하나야기는 쓰게 웃는다. 어째 변하질 않네유.

 

우리 집 밥두 매한가지인디.

 

요정 밥은 이상하게 소화가 안 돼.

 

신경이 곤두서서 아녀유? 왜, 지가 질까봐유?

 

어차피 너 이길 거 뻔히 아는데 내가 왜?

 

허유, 말이라도 고맙슈.

 

누가 먼저라 할 세 없이 둘은 키득거린다. 그렇게 실없이 웃고, 이스루기는 소다를 한 모금 또 넘긴다.

 

로봇들도 발전 많이 하긴 했어.

 

첨엔 움직이기도 버겨워서리 춤추다 막 자빠지구 그렸는디.

 

그래도 이젠 네 춤사위에 맞춰서 움직이기까지 하잖아. 뭐 여하간 센서 엄청 붙이고 돌렸다곤 하는데.

 

뭐 그렇지 않겄슈? 내 몸짓을 보고 배운 녀석인디.

 

하나야기는 어깨를 으쓱하곤 다시 하늘로 고개를 돌린다.

 

한 20년 있음 로봇한테 면허개전 내주게 생겼던데?

 

센카류는 그런 거 없응께 알아서 떼다 가라 그려요.

 

오우. 견제냐?

 

견제할 게 뭐 있슈.

 

오늘 춤사위만 봐도 말이야-

 

순간 하나야기의 몸이 굳는다. 멍하니 이스루기를 쳐다본 채 손을 뻗지도 접지도 못한 채. 이스루기는 쓰게 웃었다.

 

내가 그걸 모르겠냐.

 

하나야기의 몸이 풀리더니 양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대곤 구부정하게 숙인다. 고개가 살짝 땅으로 내려간다. 이스루기는 엉덩이를 들어 하나야기의 옆에 바짝 붙어 앉는다. 복숭아 냄새에 후추 냄새, 그리고 옅은 땀내음이 조심스레 풍겼다.

 

미츠코냐?

 

후타바항이 사준거유.

 

겔랑 그거 무진장 비싸더라.

 

프랑스 향수가 다 그렇쥬.

 

이스루기는 살짝 뻣뻣하게 팔을 하나야기의 어깨에 걸친다. 그러곤 슬쩍 끌어당겨 안는다.

 

그렇게 확 멈추는 건 센카류에서 안 가르쳐주는 거잖아.

 

그걸 어찌 알아유.

 

당주 옆에서 춤사위 보고 산 세월이 얼마겠냐.

 

그려요. 후타바항도 무대소녀니. 하나야기는 멋적게 웃는다.

 

그렇게 한바퀴 돌아 솟구쳤다 확 멎어버리니까 그 멍청한 로봇은 뭘 할지도 모르던데.

 

이스루기는 웃는다. 옆을 바라본다. 하나야기의 얼굴이 굳어있다.

 

왜 그래.

 

그거 아마 버그유.

 

응?

 

버그라구유.

 

하나야기의 말문이 막힌다. 숨을 쉬고, 입을 우물대고. 말은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 간신히 한 마디씩을 끌어낸다.

 

그거 말이유. 으응. 그 물건 있잖유? 갸는 계속 동작을 이어서 춤출 줄만 알아유. 그 뭔 소리냐 하믄, 갑자기 정지했을 때를 배운 적이 없다 이거유.

 

프로그램을 잘못 짠 건가?

 

그럴 수도 있쥬. 여하간 저건 나가 춤을 출 때 그 동작을 읽어서 다음 몸짓을 예견하는 것이니.

 

하나야기는 애써 웃는다. 소리 내어 웃어보지만 목소리에 도무지 힘이 없다.

 

이젠 이런 야바위라도 안 씀 이기지두 못하는 모양이유.

 

야 거 말이 심하다. 뭔 야바위야.

 

이스루기는 하나야기의 이마를 손끝으로 툭 친다. 힘이 없었나 머리가 휙 넘어갔다 돌아온다. 하나야기는 노려보지도 않는다. 이스루기는 한숨을 쉰다. 그러고 묻는다.

 

그걸 처음부터 알았어?

 

하나야기가 도리질을 한다. 그럼 그렇지.

 

잠시 동작을 끊을 때 자꾸 휘청대는 거 같아서리 한 번 해 봤는디 아니나 다를까 딱 그러대유.

 

그럼 야바위가 아니라 전략이지.

 

하여간 참 그러네유. 겨우 그런 야바위나 쳐서 이겨먹는 건 센카류가 아닌디.

 

왜. 이김 된 거지.

 

이런 쇳덩이 세상에 춤이 의미는 있을까유?

 

춤 실력 이야기면 아직은 니가 더 나아.

 

그럼 뭘 혀요. 곧 따라잡힐 것인디.

 

하나야기가 입을 비쭉거린다. 문득 손을 들어 올려본다. 유카타 소매 안쪽, 손목에 희미하게 실금이 보인다. 햇빛 아래에다 비춰봐도 안 보일 정도로 가는 선이지만, 하나야기의 눈에는 선하게 보인다. 당연하다. 이게 얼마나 비싼 눈인데. 문제가 생기면 그 선을 따라서 점검 패널을 열어서 부품만 빼내면 된다. 모듈화란 건 그런 거다. 문제가 생기면 몸의 1/4 정도는 바로 갈아 치울 수 있다. 아니 1/3이던가? 오른팔, 양쪽 눈, 귀, 오른 무릎 아래…음. 1/2와 1/3 사이인 모양이다. 여하간.

 

왜. 쇳덩어리로 춤추면 네가 아닌 거 같아서?

 

아직 2/3은 나요!

 

하나야기가 발끈해서 소리친다. 삽시간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엉겁결에 손으로 얼굴을 꾹 누른다. 오른손이 닿자 그 서늘함에 뺨이 식는다. 이건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나머지도 전부 너야.

 

그 말에 하나야기는 쓰게 웃는다.

 

내 몸띵이 말여우? 이젠 꽂기만 함 바루 도라이바가 깔려서 인식이 된데유. 플러그. 에. 플러그 뭐시기인디.

 

플러그 앤 플레이Plug & Play.

 

마 여하간. 글구 드라이버가 안 잡힘 원격으루 그 뭐시여, 클라우드? 그걸로 업데이트, 으응 그려, 업데이트두 해준답디다. 오…여하간 오 거스기 머스기.

 

OTA 아냐? 그 뭐냐. 오버. 오버 뭔데…아 그래. 오버 더 에어Over The Air.

 

후타바항은 그걸 다 기억혀유?

 

요즘은 자동차나 바이크도 다 그렇게 나오잖냐.

 

아니 여간, 뭔 정수기 필터마냥 갈아치우는 것두 나유?

 

결국 네 몸이잖아? 장기이식이랑 다를 것도 없고.

 

말은 고맙네유.

 

하나야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마침 버스 한 대가 하늘을 가로지른다. 항법등이 사방에서 반짝인다. 하나야기는 예전에 호시미가 술자리에서 토했던 불쾌함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 시대의 은하수! 옛 것을 추억하기엔 세상이 너무나도 변해버렸다. 애써 웃어보지만 입꼬리는 굳어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다. 괜히 손가락으로 찔러 올려본다. 하나야기는 다시 입을 연다.

 

그래두 말여라? 나 같은 춤꾼들두 이젠 하나미치花道 아래로 내려가야 할 때가 온 거유. 야바위도 한두 번이지.

 

아직 너 쌩쌩한데 뭔 하나미치냐.

 

언젠간 고것들이 나보다두 잘 추는 날이 올 터인디. 그 앞에서 허브적 해봐야 뭔 의미가 있겄슈?

 

정수리에 쾅 하고 주먹이 떨어진다. 이스루기다. 은근 아프다.

 

아 거 왜 쥐박아유!

 

뭐야, 아펐어?

 

아퍼유!

 

정수리 쪽 티탄 합금으로 덮지 않았어 너?

 

그래두 아픈 건 아퍼유!

 

냅다 오른손을 들어 주먹을 쥐고, 그대로 이스루기의 눈 앞에다 줴지른다. 정확하게 콩 하나 간격을 두고 멈춰선다. 이스루기는 질겁을 하고 뒤로 허우적대다 나자빠진다.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자세를 고쳐 앉는 이스루기를 바라보면서, 하나야기는 속으로 휘파람을 분다. 정밀도 하나는 마음에 든다. 그 풀떼기색 머리카락이 세팅을 잘 해주긴 한 모양이다. 이스루기는 그제야 평정심을 되찾곤 버럭한다.

 

야! 니가 그렇게 지름 진짜 죽어!

 

여하간 나도 아펐는디!

 

아 그래 그래 미안해!

 

이스루기는 대강 사과를 하자마자 뒷머리를 벅벅 긁는다. 그러다 다시 허리를 곧추세우고, 그녀를 바라본다.

 

여하간!

 

이스루기의 손이 쭉 뻗어나온다. 손가락 하나를 핀 채로, 하나야기의 콧잔등 앞에서 까딱거린다.

 

너 춤은 왜 추냐?

 

나가 좋아서 추쥬?

 

그럼 계속 그러고 추면 되는 거 아냐?

 

그런 거 누가 본다구-

 

둘이나 보잖아. 나랑. 너랑.

 

등골이 서늘해진다. 아. 이런 감각은 꽤 간만이다. 하나야기 카오루코는 이런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거에 새삼스레 감사해진다.

 

그냥 춰. 저 놈들이 뭐라 하건 말건 너는 너고, 춤꾼이야.

 

하나야기는 딴지를 걸어본다.

 

3년 전만 해두 버벅대던 쇳덩이가 이젠 나가 움직이는 것까지 읽는디.

 

그럼 새 제자 하나 생기는 거지. 쇳덩이 제자.

 

어으 숭혀라.

 

사람처럼 춤추고 사람처럼 읽을 수 있음 그게 사람 아냐?

 

그렇게도 보겄네유.

 

하나야기는 애써 고개를 들어본다. 하늘이 부옇다.

 

이젠 기계가 죄다 이겨먹는 시대가 왔잖유?

 

뭐 언젠간 그러겠지. 나나, 너나. 그런데 말이다?

 

이스루기는 좀 더 하나야기를 강하게 안는다.

 

아직은 아니야.

 

이스루기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 날이 오면 내려가야 하겠지만, 지금은 그 깡통 앞에 가서 그러라고. 오늘은 아녀유, 오늘은 아닝께 집에 가서 기름칠이나 하슈, 하고.

 

그러다 하나미치에서 내려갈 때 놓치면 다 후타바항 책임이유?

 

괜찮아. 내가 책임질게.

 

지금 내려가두 박수두 안 쳐줄걸유?

 

그럼 박수 쳐줄 때까지 개겨.

 

그럼 방석 날아와유.

 

그 말에 둘은 웃음을 터뜨린다. 폐부 가장 깊은 곳에서 길어내 전부 쏟아낸다. 배를 잡고, 허리를 구부리고, 허파가 허락할 때까지 웃는다.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렇게 요란하게 웃는다. 대체 얼마를 웃었을까. 하나야기가 조용해진다. 이스루기는 조용히 하나야기의 몸을 끌어안는다. 하나야기의 무게, 그리고 살 아래에 싸인 의수의 무게가 묵직하니 몸을 누른다. 팔 안에서 하나야기의 어깨가 조용히 떨린다. 기댄 어깻죽지에 물기가 스며든다. 이스루기는 아무 말없이 앉아있을 뿐이다. 이스루기는 하나야기의 머리가 자신의 머리와 닿을 때까지 그녀를 더 꾸욱 끌어안는다. 얇은 유카타 사이에서 따뜻함이 조금씩 넘어와 이스루기에게 닿는다. 그렇게 아직까지 몸을 떠는 애인을 안고, 이스루기는 하늘을 바라본다. 달이 참으로 밝다.

 

달 참 밝다야.

 

이스루기의 말에 하나야기는 까르르 웃는다. 그녀가 맹한 소리로 답한다.

 

죽기는 싫구, 같이 춤추기 좋은 달이네유.

 

그래 그래.

 

이스루기는 큭큭대면서 하나야기의 등을 느릿하게 쓸어내린다. 천의 감촉이 까슬하다. 다시 이스루기는 달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아래, 눈 앞의 벛나무를 바라본다. 방금 전보다 어째 꽃들이 더 피어난 착각이 든다. 바람이 분다. 벛나무가 몸을 떤다. 새 시대의 은하수 아래에서도 봄의 벚꽃은 여전히 춤춘다.

 

언제나 그렇듯이.

더보기

 

이 이야기는 조직 『프론티어』가 창설되기까지의 이야기.

 

 

 

“찾았어?”

 

“아직! 하지만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다행이야. 그 아이들이라면 우리의 목표에 적합할 테니까.”

 

“부품 쪽은?”

 

“그쪽은 곧 답을 들을 수 있을 거야.”

 

“알겠어. 다시 나갔다 올게, 상어 씨!”

 

“응. 수고해줘. 래빗.”

 

 

어느 건물에서 벗어난 미소라와 아루루는 각자의 신체를 돌리거나 쭉 펴면서 찌뿌둥한 근육을 풀었다. 어두운 곳에서 몇 안 되는 전등에 온 신경을 쏟고 오니 온몸이 뻐근했다. 무의식중에 어깨를 짚었다 뗀 아루루가 손에 묻은 진득한 액체를 옷에 슥슥 닦았다.

 

“그거 또 손댔어?”

 

“응.”

 

“정말 마를 때까지 기다리지를 못한다니까.”

 

미소라는 여전히 미끌거리는 아루루의 손을 붙잡고 뒷주머니에 쑤셔져 있던 손수건을 꺼내 기름을 닦아주며 불평했다.

 

“여기 의사는 실력은 좋은데 뭘 쓰는지 도통 모르겠단 말이야.”

 

“잘 고쳐주니까 된 거 아닐까?”

 

“그건 그렇지만 좀 불안하잖아.”

 

“미소라는 걱정이 많다니까!”

 

쾌활하게 웃은 아루루는 윤활유가 덕지덕지 묻은 관절부를 보여주듯 빙글 돌렸다. 기계로 된 팔꿈치는 부딪히는 소리 없이 매끈하게 돌아갔다. 그가 만족했으면 된 거다. 미소라는 어쩔 수 없는 미소로 화답했다. 그럼 이제 다시 일을 시작할 시간이다. 미소라가 말했다.

 

“아까 못 주운 고물을 주우러 가-”

 

그 순간 날카로운 비명이 둘의 귀를 찔렀다. 틀림없는 인간의 소리였다. 미소라와 아루루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소리가 난 골목으로 튀어 나갔다. 비명은 한 번 들리고 멈췄다. 미소라는 큰일이 벌어졌을까 기계로 된 다리에 속도를 더 올려 아루루를 제쳤다.

 

“먼저 가 있을게!”

 

정말로 사건이 벌어졌다면 뒤따라오는 아루루에게 신고를 부탁하고 자신은 응급처치를 해야 한다. 미소라는 손수건을 꺼냈다가 질척한 느낌에 이마를 탁 쳤다. 응급처치는 내 옷으로 해야겠네. 많이 헤지고 더러워졌지만, 목숨에 그런 걸 따질 수는 없었다.

그리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 미소라의 눈앞엔 분홍빛 작은 토끼가 있었다.

 

“허억, 허억... 미소라-...”

 

몇 발짝 뒤늦게 온 아루루도 헉헉대며 고개를 들었다가 분홍색 토끼를 보았다. 귀여운 볼살, 꼿꼿이 솟아있는 귀,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거대한 망치는 너무나도 커서 저절로 그걸 든 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

 

“토끼 인간?”

 

“나는 래빗! 뒷골목을 수호하는 토끼 경찰! 너희들은 누구지?”

 

 

됐다. 예상대로다. 상어가 점찍어둔 아이들은 래빗의 작전에 보란 듯이 걸려들었다. 자신을 경찰이라 밝힌 래빗은 대답이 없자 어깨에 둘러멨던 망치를 한 번 휘두르곤 덫에 걸린 아이들을 향해 겨눴다. 그러자 그 아이들은 화들짝 놀라 양팔을 올리며 답한다.

 

“저, 저는 미소라구요.”

 

“난 아루루!”

 

미소라와 아루루. 가명을 사용하지 않는다니 특이 케이스다. 이 뒷골목에선 가명을 쓰는 게 안전할 텐데. 아니면 가명 따위는 쓰지 않아도 되는 위치라는 건가?

 

“너희는 왜 가명을 안 쓰는 거야?”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했다. 대답에 따라 이 망치의 방향이 달라질 것이다.

 

“난 내 이름이 좋은걸! 꼭 있어야 한다면 쓰겠지만.”

 

“가명을 못 정했기도 하구요...”

 

래빗은 망치를 거둬 다시 어깨 위로 둘러멨다. 크기에 비해 가볍게 돌아가자 아이들이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진다. 이건 우리 편이 확실해졌을 때 말해도 괜찮다. 래빗은 입이 근질근질했으나 지금은 일을 마무리 짓는 것으로 집중을 돌렸다.

무언가가 부서져 쌓인 돌무더기 위에 서 있던 래빗은 아래로 펄쩍 뛰어 내려와 바닥에 누워있던 여성에게 손을 뻗었다.

 

“다친 데는 없지? 요즘은 사악한 악당들이 많아서 조심해야 해. 방금 있던 악당들은 아직 내 친구가 되지 않아서 말이야. 친구가 되면 너에게 사과하라고 해 둘게. 여기서 왼쪽 골목으로 나가면 안전할 거야.”

 

“아, 가, 감사합니다... 사과는 괜찮습니다...”

 

이 사람은 래빗과 상어가 작전을 꾸밀 때마다 고용하는 A.I.배우였다. 일이 끝나면 즉시 사라지는 게 장점이라 지금도 래빗의 손을 잡고 일어나자마자 바로 골목으로 돌아 사라졌다. 그 골목에는 그를 위한 보수가 있다. 그 사정을 모르는 저 둘은 얼빠진 얼굴로 있을 뿐이다.

 

“벌써 사라졌네. 다치지는 않았나 봐.”

 

“저기... 저 사람은 괜찮은 건가요? 아까 비명을 지르셨는데.”

 

“괜찮아.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이 토끼 경찰, 래빗이 잘 해결했으니까!”

 

래빗은 제 심장 부근을 주먹으로 툭 치고 발끝으로 방금까지 서 있던 돌무더기를 툭툭 찼다. 그러자 벽이 부서진 잔해 밑에서 사람이 괴로워하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뒤에 귀 내부에 설치된 초소형 이어폰에서 상어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확인했어. 수고했어. 곧 폴리스가 갈 거야.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을 알려줄게.]

임무 확인 알림을 받은 상어가 래빗의 오른눈에 지도를 띄웠다. 현 위치에서 깜박이던 빨간색 토끼 모양 얼굴이 이내 적당한 속도로 움직여 길을 알린다. 래빗은 지도를 따라 앞장섰다.

 

“너희를 데려갈 곳이 있어. 빨리 가자. 경찰과 엮이는 건 너희도 싫잖아?”

 

 

 

그 시각, 상어는 은은한 연주황색으로 인테리어 된 고급스러운 집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테이블의 건너편에는 이 집의 주인이자 나라를 주름잡는 부품회사의 후계자, 에비스 츠카사가 마주 앉아 잔을 들고 있다.

 

“찾아왔다는 건 다 모였다는 거겠네?”

 

“맞아. 마지막은 당신이야. 어떻게 하겠어?”

 

츠카사는 한 모금 마신 찻잔을 내려놓고는 상체를 뒤로 기댔다. 눈앞의 상어는 이전에도 찾아와 뜻을 밝히고 함께 하겠냐 물었었다. 그때는 불확실함에 기대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었지. 자신은 이 나라의 모든 기계 부품을 취급하는 기업의 후계자. 이제는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여야 했다. 그렇기에 지난번, 츠카사는 상어와 약속을 했다. 모든 인원이 완벽하게 모였을 때 참가하겠다, 내 이익은 확실히 보장해달라. 상어는 약속을 잘 하지 않지만 한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그가 찾아왔다는 건 모든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리라.

 

“참가하겠어. 당신의 계획.”

 

“그럴 줄 알았어. 고마워.”

 

상어는 웃으며 남은 차를 목으로 넘겼다. 오른눈을 감고 왼쪽 관자놀이를 툭 치면 자신의 보금자리에 설치해둔 CCTV 영상이 자신만 보이게 펼쳐진다. 래빗과 그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계약서를 쓰러 갈까.”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안에 있는 건 아무것도 안 건드렸어!”

 

래빗이 방방 뛰어 상어 품에 와락 안겼다. 상어의 보금자리는 수많은 모니터의 빛 때문에 푸른색으로 빛났다. 모두가 작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다들 내 집에 온 걸 환영해.”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건 상어였다. 그는 서랍에서 5개의 태블릿을 꺼내와 각자의 앞에 두었다.

 

“자기소개부터 해볼까? 나는 상어야. 존재하는 정보를 수집하는 사람이지. 웬만한 정보는 전부 내 손에 있어.”

 

“나는 래빗! 뒷골목의 치안 담당이야. 사건이 벌어지면 저 망치로 해결하고 있어.”

 

“나는 이 나라의 모든 기계 부품을 판매하는 회사의 후계자, 에비스 츠카사야. 너희들의 팔과 다리에도 우리 회사 부품이 있겠네.”

 

츠카사가 손가락으로 아루루의 팔과 미소라의 다리를 가리켰다. 그렇게 자기소개의 순서는 넘어간다. 정말 해도 될까, 머뭇대던 미소라를 놔두고 아루루가 먼저 팔을 번쩍 들었다.

 

“저는 오츠키 아루루! 쓰레기산에서 쓸만한 부품을 주워 팔고 있어요!”

 

“아, 아루루! 이 사람들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갑자기 말을 하면 어떡해!”

 

“그렇지만 저기 높은 사람도 있는걸?”

 

“아... 저, 저는 카노 미소라구요. 아루루와 같은 일을 하고 있어요.”

 

미소라까지 자기소개가 끝나자 래빗이 와아, 하며 손뼉을 쳤다. 몸이 조금씩 들썩거리는 걸 보니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을 번갈아서 흔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래빗의 박수가 끝나자 상어가 자신의 태블릿을 켜 몇 번 정도 화면을 눌렀다. 그 순간 모두의 태블릿이 켜지고 무언가를 띄웠다.

 

“상황 설명 없이 온 사람들도 있으니까 다시 한번 말할게. 그 앞의 계획서를 보면서 들어도 돼. ...조직을 하나 만들려고 해.”

 

운을 띄운 상어가 이은 말은 이랬다. 현재 정부 쪽에서 자신의 정보 수집을 방해하고 있어 쓸만한 정보가 모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를 해결하기 전까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정보를 수집해야 하는데 이에 적합한 인물들을 모은 게 지금 이 자리라고 했다. 이 자리는 비록 자신의 이익을 위해 꾸렸으나 서로의 이익도 극대화하게끔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증거로는 태블릿에 뜬 계약서. 이익? 중얼거리는 아루루에게 래빗이 답했다.

 

“난 여기에 참가해서 상어가 감시하고 있는 뒷골목의 모든 CCTV를 받기로 했어.”

 

비전 기능이 있는 안구거든. 자신의 오른눈을 가리키던 래빗은 어느새 상어의 무릎 위에 앉아있었다. 상어는 왠지 모르게 아까보다 한결 편안한 표정이었다. 미소라가 고개를 갸웃대자 상어가 츠카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아루루는 태블릿의 화면을 이리저리 눌러보는 중이었다.

 

“나는 치고 올라오는 라이벌 회사들의 침몰을 보장받기로 했어.”

 

설명을 들으며 화면을 보던 미소라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상어의 말대로라면 이 조직에 이름을 넣는 순간 반역 세력이 된다. 조직원들은 보상을 받는 대신 그만큼의 일을 해야겠지. 래빗은 무력으로 사태를 벌이거나 제압할 거고 츠카사는 상어와 협력해 해킹이 가능한 기계장치를 판매할 것이다. 부정부패를 돌이킬 수 없어 몇몇 기업이 정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지만 그런데도 국가기관은 존재했다. 이를 공격하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다 자신들이 무슨 능력이 있어 여기에 껴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사람들 사이에 껴있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그들의 수준에 걸맞은 뭔가 대단한 것이 자신들에게는 없었다. 나라를 주름잡는 기계상의 후계자, 경찰이라곤 하지만 누가 봐도 깡패로 보이는 이상한 토끼 가면, 그리고 예상대로라면 자신들의 사생활까지 전부 알고 있을, 뒷세계의 해커. 이들을 잘못 건드리면 이 자리에서 사회적으로 존재가 말살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미소라는 슬며시 고개와 함께 손을 들었다.

 

“저희는 그... 조직을 만드는 데에 기여할만한 힘이 없어요. 원하는 것도 없구요. 다른 사람을 찾아보셔야 할 거 같은데요.”

 

이럴 때는 최대한 조심스럽고 빠르게 빠져야 한다. 조용히 잘살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미소라는 옆에서 태블릿에 뭔가를 적고 있는 아루루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천천히 일어났다.

 

“그럼 저희는 가볼게요. 아루루, 가자.”

 

“응?”

 

아루루가 따라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상어가 자신의 태블릿을 들어 미소라에게 화면을 보여줬다.

 

“네 친구는 이미 사인했는데.”

 

“네?”

 

“정말이야. 확인해볼래?”

 

미소라는 서둘러 아루루의 화면을 보았다. 서명란에 제 친구의 필체로 ‘아루루’라는 글자가 온갖 그림과 함께 적혀 있었다. 미소라가 고개를 확 돌려 아루루를 바라보자 그는 웃으며 답했다.

 

“읽어보니까 딱히 문제가 될 건 없어서 사인했는데. 안 되는 거였어?”

 

“너 저게 뭔 줄 알고! 우리가 무슨 일을 하게 될 줄 알고...!”

 

당황한 미소라를 진정시킨 건 츠카사였다. 그는 특유의 편안한 말투로 미소라에게 추가 설명을 했다.

 

“상어는 너희에게 어려운 걸 시키진 않을 거야. 나와 래빗은 그럴만한 능력이 있으니까 하는 거지만 너희들은 아까까지도 고물을 주워 내다 팔던 ‘평범한’ 사람이잖아? 상어는 그런 비슷한 걸 시키겠지. 과도한 걸 주문하지는 않아.”

 

“맞아. 나는 너희들이 그저 내 초소형 드론이 보지 못하는 곳이나 해킹하지 못하는 곳을 정탐해주었으면 해. 딱 그 일만 줄 거야. 대신 너희들이 필요한 모든 정보를 줄게. 못 믿겠으면 먼저 정보를 받아 가도 좋아. 너희가 아까 만난 돌팔이 의사가 사용했던 윤활유의 정체를 알고 싶지 않니?”

 

“그, 그건.”

 

눈앞의 그는 우리의 사생활을 전부 꿰뚫고 있다. 미소라는 어느새 다시 자리에 앉은 아루루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친구를 매정하게 버리고 가는 성격이 아니었다. 도망갈 길은 막혀버렸으니 미소라는 집어넣었던 의자를 다시 꺼내 앉아 상어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좋은 조건이다. 정탐이 뭐가 어려운가. 생존을 위해서라면 뭐든 해본 그들이었다. 자신들의 팔다리도 살아남기 위해 멀쩡한 신체를 불법으로 개조한 것이다. 미소라는 계약서를 다시 보았다. 모두가 자신만을 바라보는 걸 보니 아무래도 다들 결정이 끝난 모양이었다. 하아, 미소라는 한숨을 푹 쉬고 빈칸에 제 이름을 적었다. 계약서가 슉 사라졌다.

 

“다들 고마워. 이걸로 계약은 성립되고 조직은 꾸려졌어. 그 태블릿은 각자의 몫이니까 가져도 좋아.”

 

끝이다. 미소라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 한숨을 쉬었다. 츠카사가 다가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에 휘둘려서 당황했지? 괜찮아. 상어는 약속한 건 반드시 지키는 거로 유명하니까. 아마 너희도 지금까지 살아왔던 환경보다 더욱더 편하게 살 수 있을 거야. 그가 말하는 일만 해준다면 말이야.”

 

“그럴까요...”

 

고개를 살짝 틀어 본 아루루는 어느새 래빗과 노는 중이었다. 래빗이 ‘우사핀 가면 3호 포즈!’ 등의 소리를 하며 괴상한 자세를 취할 때마다 신나서 따라 하고 있다. 아루루는 그러다 아! 하며 동작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조직을 만들었다고 했잖아. 그럼 조직 이름은 뭐야?”

 

그 말에 모두가 다시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먼저 의견을 꺼낸 것은 래빗이었다.

 

“우사핀 히어로!”

 

“그 이름은 조금...”

 

난색을 보인 츠카사가 제시한 이름은 비밀조직회를 줄인 비조회. 상어는 어떤 이름이든 좋다고 했다. 미소라가 몸을 뒤로 빼고 손을 설레설레 젓자 차례는 자연스레 아루루에게 돌아갔다. 아루루는 잠시 생각하더니,

 

“프론티어는 어때?”

 

라며 모두를 바라보았다. 아루루와 시선을 마주친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계라는 뜻도 있지만, 앞만 떼어보면 front,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도 있네. 나는 괜찮다고 생각해.”

 

뜻을 덧붙인 상어가 확정을 지었다. 조직 『프론티어』가 창설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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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란 존재의 증명이다.

 

 

[ 전국적으로 일어나는 연쇄 뇌 이식 컴퓨터 해킹 사건. 피해자들의 공통점이 없고 연결고리 또한 없는 점을 보아 제 3자가 의뢰를 받아 범죄를 저지르는 케이스로 생각된다. 따라서 딥웹을 중심으로 수사를 넓힐 예정이다. ]

 

수사에 외부인원입니까?

 

응, 아무래도 관련 전문가가 하나쯤은 있어야 속도가 나지 않겠냐는 의견이 상부를 중심으로 나와서. 신원확인도 끝났고 주변 사람들의 신상도 간략하게 조사했다고 하니까 괜찮을 거야. 나도 만났는데 괜찮았어.

 

민간인이 수사에 참여한다니 불안하지만……호시미 씨가 직접 확인했다면 괜찮겠죠.

 

텐도 씨가 그렇게 신뢰해준다니 부끄러운걸. 오후에 인사하러 온다고 했으니까 곧 만날 수 있을 거야.

 

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달칵. 쥰나가 문을 닫고 나감과 동시에 한숨을 뱉었다. 아무리 철저하게 신원조사를 한다고 해도 외부인을 팀에 투입하다니. 언론에 알려지면 얼마나 시끄럽게 난리를 칠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무슨 생각인 걸까. 여러 불만이 머리 속을 맴돌지만 이미 결정된 사항이다. 이제 와서 불만을 토로한다고 해서 바뀌는 일은 없겠지. 그래도 호시미 씨가 확인했다고 하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다. 마야는 생각을 정리하고 책상에 잔뜩 널릴 서류 중 하나를 손에 들었다. 일단 잔뜩 쌓인 서류들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야는 뻣뻣한 뒷목을 주무르며 뭉친 근육을 풀었다. 곧 외부 협력자가 인사하러 온다고 했던 시간이다. 탐탁지 않은 결정이지만 같은 배를 타게 된 이상 인사는 해야 예의겠지. 기지개를 피고 방 문을 열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외부 협력자는 이미 도착한 상태였다. 카렌을 제외한 다른 수사관들은 이미 인사를 다 했는지 자연스레 뒤로 물러섰다. - 카렌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좋아하는 음식을 캐묻고 있었다. – 곧 카렌은 마야를 발견하고 크게 손을 흔들었다.

 

텐도 씨 늦었어~!

 

죄송해요. 서류를 정리하다가 시간을 놓쳤네요.

 

작게 웃으며 카렌에게 인사한 마야는 외부 협력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옆에 사회 평가 및 기본 인적 사항이 적힌 가상 창이 떴지만 무시했다. 기본적으로 경찰은 자신이 판단한 사실만 믿는 족속이니까. 허리까지 내려오는 웨이브 진 금발. 투명하게 빛나는 자수정 빛 눈동자. 평균보다 큰 키. 실내에서 오래 지내는지 하얀 피부까지. 빠르게 인상을 정리한 마야는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세요. 연쇄 해킹 사건 수사팀 소속 수석 수사관 텐도 마야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기술 관련 자문을 맡게 된 사이죠 클로딘입니다. 서툴더라도 잘 부탁 드립니다.

 

통성명이 끝난 후 쥰나가 대표로 수사 본부를 안내했다. 1층의 공유 공간과 공유 주방부터 2층의 개인 방까지 안내를 끝낸 쥰나는 서류철을 클로딘에게 건넸다.

 

급하게 미안. 사실 여유롭게 소개해주고 싶지만……우리도 인원이 부족해서. 혹시 괜찮다면 텐도 씨와 같이 현장에 가줄 수 있을까?

 

또 사건인가요? 저번 사건 일어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요.

 

지원요청이야. 해킹사건으로 의심되니까 우리 쪽으로 연락을 준 모양이야. 텐도 씨가 수석 수사관이기도 하고 웬만한 자료는 기억하고 있으니까 사이죠 씨는 별 부담 없이 기술적인 면만 확인해줬으면 좋겠어. 괜찮을까?

 

물론이지. 일하기 위해서 왔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마.

 

고마워. 텐도 씨도 잘 부탁할게.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둘은 본부를 나서며 쥰나가 전송해준 자료를 열어봤다. 근처 관할 사건일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거리가 있는 지역이었다.

 

생각보다 먼 곳이네요. 혹시 운전 가능한가요?

 

물론이지. 하지만 이 근처는 익숙하지 않아서 헤맬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다면 내가 운전할게.

 

길이야 제가 옆에서 안내하면 되니까 괜찮습니다. 그럼 부탁 드릴게요.

 

Oui

 

.

걱정이 무색하게 둘은 길을 헤매는 일 없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야의 안내 솜씨가 좋았던 것도 있지만 의외로 클로딘이 길을 잘 찾는 것도 한 몫 했다. 처음에 헤맬지도 모른다고 했던 건 뭐였는지, 안내가 늦어져도 여러 번 다녀본 사람인양 자연스레 길을 찾았다.

 

솜씨가 뛰어나시네요. 굳이 안내를 안 했어도 괜찮았겠는걸요.

 

설마. 안내가 없었다면 아직도 길 위에서 헤매고 있었을걸.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마야는 클로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근처 경관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제지하던 경관은 곧 마야를 알아보고 경례를 올리더니 길을 터주었다. 안에서 팀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라는 안내도 잊지 않았다.

 

안에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던 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피해자는 근처 직장에 다니는 A. 최초 발견자는 룸 셰어를 하고 있던 대학 동기 B. 평소 규칙적인 생활 습관으로 휴일에도 늦잠 자는 일이 없던 A가 오후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자 이상하게 생각한 B가 확인하러 들어갔다가 발견했다고 한다. B의 증언에 따르면 미동도 없이 잠들어있었다고 한다. 신고 후 A는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검사 결과 뇌 내 컴퓨터 이상으로 인한 의식불명이라는 소견을 확정, 수사 본부에 연락이 갔다고 한다. 최초 발견자도 이상한 점은 느끼지 못했다고 증언했다는 말을 들은 마야는 클로딘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런 사건은 외관에 특이한 점이 남지 않으니 수사하기 더 까다롭다. 전문 장비를 갖춘 병원이나 관련 업계가 와야 무언가 알아볼 수 있으니 수사관들이 기피하기 마련이다. 그래도 사이죠 씨가 있으니까 뭐라도 알아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보고 있으니 곧 사이죠 씨 는 내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여러 가지 나오기는 했어. 그렇지만……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 가면서 지금까지 수사한 자료들 보고 모두에게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아?

 

예, 물론. 그럼 가는 길에는 제가 운전할까요?

 

응. 부탁할게.

 

둘은 경관에게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나왔다. 올 때와 반대로 마야가 운전석에 앉고 클로딘이 조수석에 앉는 형태였다. 차에 타자마자 클로딘은 미리 전송 받았다는 자료들을 읽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길은 평소보다 한산하고 느긋했다. 신호에 걸려 정차한 마야는 곁눈질로 클로딘을 살펴봤다.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굳게 닫힌 눈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머리 굳기로 유명한 경찰 상층부가 직접 자문 역할로 지명할 정도면 능력이 뛰어나다는 뜻이겠지. 또한 그 점을 널리 인정받고 있다는 뜻도 될 것이다. 오늘 처음 만났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면 생각이 깊다는 점도 알 수 있다. 마야는 핸들을 손 끝으로 툭툭 치며 사건 현장을 다시 떠올렸다. 그 뒤 클로딘의 애매한 표정도. 대체 뭘 발견했길래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걸까.

 

본부로 돌아온 둘은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던 쥰나와 제일 먼저 마주쳤다. 어땠어? 마야는 다급한 목소리로 묻는 쥰나의 질문에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여전히 침묵을 지키던 클로딘을 돌아봤다. 한참 머뭇거리며 말을 고르던 클로딘은 정리가 끝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마……동일 범이 맞을 거야. 하지만 수사하던 사건들과 범행 수법을 틀려. 자세한 이야기는 모두 있는 곳에서 하고 싶은데 불러줄 수 있어?

 

어? 어, 응. 물론이지. 그럼 휴게실로 부를 테니까 먼저 가서 기다려줘.

 

쥰나는 서둘러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아마 개인실에서 할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부르러 가는 거겠지. 클로딘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떠올리며 길게 한숨을 뱉었다. 아직 확증을 얻기에는 근거가 부족한 가설이다. 오는 길에 분석 요청을 했으니까 늦어도 오늘 밤까지는 결과가 나오겠지만, 수사 팀한테 미리 알려줘야 맞겠지.

 

곧 모든 인원이 휴게실에 둘러앉았다. 이번 현장에서 뭘 발견했길래 모두를 부른 거야? 이상한 점이라도 있었어?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질문을 들으며 클로딘은 초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같은 범인이 저지른 범행은 맞을 거야. 하지만 수법은 여기서 수사하던 사건들과 달라. 방금 텐도씨랑 다녀온 사건은 해킹이 아니라 악성 프로그램으로 저지른 일이야. 지금까지 수사한 사건들은 모두 뇌 내 컴퓨터를 해킹해서 기억을 지우거나 가짜 기억으로 대체하는 방식이었잖아. 하지만 이번 사건은 뇌 내 컴퓨터를 아예 망가트렸어. 병원 측에 물어보니까 모든 데이터도 날아가고 컴퓨터도 사용 못 할 정도로 망가졌다고 하더라. 그래서 만약 의식이 돌아와도 정상적인 생활로 복귀하는 일은 힘들 거라고 했지만 이건 숨겨도 상관 없겠지.

 

악성 프로그램에 감염되면 원격으로 컴퓨터를 조작할 수도 있고, 이번처럼 망가트리는 일도 가능해. 이제는 보안이 철저해져서 거의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실수로 감염된 네트워크에 접속하거나 파일을 다운받는 사이에 감염됐을 수도 있으니까.

 

목이 타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어느새 주위 분위기는 깊게 가라앉은 채였다. 하긴, 파장이 클 이야기긴 하니까. 눈치가 빠르다면 더 중요한 점을 알아차렸을 테고. 예를 들면 얼굴이 파랗게 질린 호시미 관리관이나 텐도 수사관처럼.

 

만약 그런 경로로 감염된 거라면, 다수의 피해자가 언제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이잖아. 어느 네트워크가 감염되었는지 알 수 없으니까.

 

응. 그럴지도 모르지. 최악의 경우에는 악성 프로그램에 복제 기능이 있는 거지만. 복제 기능이 있다면 연결된 네트워크를 통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퍼져나갈 테고.

 

그렇게 되면 사이버 테러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게 돼.

 

마지막 말이 모두의 귀에 들어가자 분위기가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다들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며 굳어버린 탓에 휴게실 안은 침묵만 흘렀다. 가설처럼 흘러간다면 사회의 혼란을 초래하는 것은 물론, 붕괴까지 갈 수 있었다.

 

생각한 방법이라도 있어유?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에 상부는 움직이지 않을 거여요. 말을 해도 무시하고 넘어갈 게 뻔해유.

 

카오루코가 초조하게 옆머리를 꼬았다 풀길 반복했다. 최악의 상황만은 막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상황이다. 뚜렷한 증거가 없는 한 지금 이야기는 가설일 뿐이다. 고작 가설 따위로 상부가 움직일 리 없다는 사실은 카오루코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피해자의 뇌 내 컴퓨터 분석 의뢰 맡겼어. 현장 네트워크도 분석 요청했고. 쓸만한 증거는 없겠지만 설득하고 백신 프로그램 만들 수 있는 정도는 될 거야. 위험성을 강조하면 겁 많은 누군가는 협조하겠지.

 

마지막 문장을 말한 뒤 클로딘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다만 다들 대책을 생각하느라 바쁜 탓에 눈치채지 못했다. 마야를 제외하곤. 마야는 의아한 눈으로 클로딘을 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다른 일이 더 중요하다.

 

 

분석한 결과는 다음 날 이른 아침에 도착했다. 그 때부터 수사팀은 각자 역할에 따라 개별 행동을 시작했다. 쥰나와 나나, 마야는 상부를 설득하기 위한 문서를 작성하고 발표 준비, 마히루와 카렌, 히카리는 피해자들의 기록을 다시 훑어보기, 카오루코와 후타바는 의심되는 사건의 조사를 맡았다. 마지막으로 클로딘은 문서의 신뢰성을 위한 레퍼런스 제공과 백신 프로그램 제작을 담당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쥰나가 대표로 발표를 하는 날. 모두 휴게실 식탁에 둘러앉아 쥰나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식탁 위에는 나나가 직접 만든 쿠키와 파운드 케이크가 잔뜩. 아무래도 초조하고 긴장되면 요리를 하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달칵, 현관문 열리는 소리. 타박타박 휴게실로 걸어오는 발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휴게실 문으로 집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휴게실 문이 열리고 쥰나가 들어왔다.

 

쥰나쨩 어땠어?!!

 

나나가 벌떡 일어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이상한 말은 안 들었어? 괜찮아? 안절부절 못하며 주변을 맴도는 모습은 마치 충직한 골든 리트리버처럼 보였다.

 

괜찮았어. 상부도 납득해줬고.

 

그래유? 거 참 의외네요. 지는 분명 트집잡구 귀찮게 굴 거라 생각했는디.

 

뭐……그렇긴 했지만……자기들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겠지. 백신 프로그램이 완성되면 제일 먼저 달라고 요구했으니까. 사이죠 씨, 얼마나 더 걸릴 것 같아?

 

늦어도 내일이면 완성이야. 덕분에 계속 철야해서 피곤하지만.

 

클로딘은 초췌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요 며칠 테스트 작업을 완료하느라 무리했더니 당장이라도 잠들 수 있을 정도로 피곤했다. 그래도 덕분에 완성이 목전이니까 어쩔 수 없지.

 

그래? 그럼 완성되면 텐도 씨랑 같이 상부에 다녀와 줄 수 있을까? 사이죠 씨 혼자 가기에 익숙하지 않은 장소잖아.

 

그렇게 해주면 나야 고맙지. 부탁해도 될까? 텐도 마야.

 

물론이죠. 최근에는 저도 가지 않았던 터라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잘 보조할게요.

 

고마워, 텐도 마야. 이래저래 신세지는 게 많네.

 

그 때 사이죠 씨 표정이 어땠지.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해도 하얗게 안개가 낀 것처럼 표정만 지워진다.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수사에 합류했던 걸까.

 

백신 프로그램이 완성된 날은 그 다음 날 이른 오후였다. 쥰나가 상부에 연락하는 사이 클로딘은 간단하게 씻고 옷을 정리했다. 마야는 클로딘의 옆에서 옷을 골라줬다. 아무래도 높으신 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니까요, 깔끔하게 입고 가는 편이 구설수에 안 오르고 좋아요. 충고는 덤이었다.

 

경찰 본부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몸수색을 하고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 금속 탐지기를 통과한 둘은 약속 장소로 향했다. 백신은 상부의 설치가 끝나면 대중에게 공개될 예정이었다. 본인들의 안위를 최우선순위로 두는 모습이 언제 생각해도 우스웠다. 그렇게 걱정되면 평소에 잘 처신하면 될 것을.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는 사이에 도착한 약속장소는 이미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드물게 경호원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왔구먼, 그래서 백신은 확실하게 완성된 건가?

 

네. 테스트도 마쳤으니 문제는 없을 겁니다.

 

클로딘은 덤덤하게 대답하고 메고 온 가방에서 컴퓨터와 칩을 꺼냈다. 그럼 뇌 내 컴퓨터에 접속해서 백신 설치를 진행하겠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주의사항과 혹시 어지럼증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경고를 덧붙이며 노트북을 만지작거렸다. 곧 클로딘은 노트북에서 사람들로 시선을 돌렸다.

 

설치 완료 되었습니다. 혹시 이상이 느껴지십니까?

 

아니, 아무렇지도 않네…..?!

 

클로딘과 가장 가까이 서있던 사람이 쓰러지는 걸 시작으로 차례차례 의식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마야는 다급이 쓰러진 사람들에게 다가가 상태를 확인했다. 호흡도 맥박도 정상, 하지만 의식은 없다. 쓰러지기 전까지 어떠한 징후도 없었고 병이 있었다 한들 이렇게 한 순간에 모두가 쓰러지는 일은 극히 드물다. 대체 어떤 일로? 잔뜩 당황한 마야의 뒤에서 클로딘이 덤덤하게 말을 꺼냈다.

 

저를 현행범으로 체포하시면 될 것 같네요, 텐도 수석 수사관님.

 

……사이죠 씨, 이게 대체 무슨. 범인의 사주를 받은 일인가요?

 

음, 아뇨. 사주를 받을 것도 없이 제가 모든 일의 범인인걸요. 이것도 미리 계획했던 일이에요.

 

그러니까 수사관님이 절 체포하시면 돼요. 자세한 이야기는 취조실에서 해도 괜찮죠?

 

허망한 표정의 마야와 반대로 클로딘의 표정은 아주 밝고 개운했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일을 끝낸 사람처럼.

 

 

 

[ 동기, 말인가요. 아, 아뇨. 제일 처음 물어볼 거라 예상하고 있었거든요. 예상이 맞아서 놀란 것뿐이니까 괜찮아요. 동기, 동기라……”

 

피의자는 몇 분인가 입을 다물고 생각에 집중했다. 말을 정리하는지 중간중간 입을 열었다 닫길 반복하더니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목적인 상부 사람들이었어요. 그걸 위해서 연쇄 해킹 사건을 시작한 거고. 좀 떠들석해야 움직이기 편하잖아요. 불안감도 같이 커져야 했고. 응? 다른 피해자에게 미안하지 않았냐고? 음……별로 그런 생각은 없었어요. 어차피 예상한 대로 다른 피해자들은 의뢰를 받아서 정했어요. 자신이 잘못해서 그런 처지가 된 건데, 굳이 신경 쓸 이유는 없죠. 무고한 피해자라고 할 사람은 그, 제가 수사팀 합류하자마자 지원 나갔던 사건 정도일까. 그래서 그 피해자는 무사히 의식도 돌아왔고 사회 복귀도 했잖아요.”

 

“왜 상부 사람들이 목적이었냐니. 뻔한 질문이네요. 복수를 위해서지. 예전에 상부가 사건 하나를 덮기 위해 교통 사고를 사주한 적이 있어요. 나랑 내 가족은 거기에 운 없이 휘말렸고. 내가 유일한 생존자였는데, 머리를 크게 다쳐서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지. 그리고 일어났을 때는 머리에 문제가 생겼고.”

 

여기까지 말한 후 피의자는 짧게 웃었다. 물을 마시고 말을 다시 시작하는 모습은 의외로 침착했다.

 

“내가 한 일도 마치 소설의 일부처럼 느껴진다고 해야하나, 기억이 아니라 지식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까. 내 기억이지만 내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거죠. 마치 책에서 읽은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원인을 찾아보니 사건 당시 충격으로 뇌 내 컴퓨터에 이상이 생겼고, 그 탓에 뇌에도 영향이 미친 것 같다고 하더군요. 고치고 싶어도 어떻게 할 방도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 뒤로 쭉 그렇게 살았지.”

 

어떤 기억도 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고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건 생각보다 외롭고 힘들어요.

 

“한창 공부하던 때 장난으로 경찰 상부의 컴퓨터를 해킹한 적 있어요. 그냥 간단하게 건들기만 했지만. 그러다 우연히 대충 삭제된 파일을 열어봤고, 사고에 대해 알게 된 거죠. 그 때부터 복수를 계획했어요. 이게 전부.”

 

심문을 담당한 텐도 수사관이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없었다. 결코 좋은 표정을 아니었을 거라 추측만 할 뿐. 아닌 척해도 내심 사이죠 씨를 인정하고 있다는 게 훤히 보일 정도였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다들 깨어날 거예요. 일주일 정도 기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물론 깨어난 뒤에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네요. 컴퓨터도 망가졌을 거고 기억도 다 날아갔을 테니까. 후유증도 남을 테고. 지금까지 저질렀던 악행의 피해자들이 어떤 기분일지 실컷 느낄 수 있겠죠.”

 

그 후 심문은 평탄하게 흘러갔다. 피의자는 아무런 저항 없이 모든 질문에 답을 했고, 며칠 뒤 감옥으로 이송될 예정이다.

이 기록도 멋대로 작성한 것이다. 만약 들키면 폐기 될 확률이 높다. 하지만 누군가는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지면 사건의 범인은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 할 테니까.

 

사람은 기억으로 완성되는 존재다. 피의자는 모든 기억이 실감 나지 않고 그저 책 구절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단순한 문자의 나열 또는 지식일 뿐이라고. 어떤 삶일지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삶은 과연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걸까. ]

 

연쇄 해킹 사건 마무리 보고서 일부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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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희생한 이치에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후미







그 날의 너의 마음은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름다웠다.





후미, 이번에 내 소원 하나 들어줄래?







불현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휘휘 저었다. 환청이나 컴퓨터에서 나오는 전기 소리가 아닌듯한 생기가 듬뿍 들어있던 울림이었다. 후미는 그걸 아직까지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제 향기를 듬뿍 뿌리며 손을 흔드는 이치에가 있었다. 감고 있는 목도리는 아직까지도 변함이 없다. 벚꽃이 늬여진 연분홍색 머리칼은 부드러움을 담고 불어오는 바람에도 쉬이 살랑거렸다. 그 소리를 타고, 후미는 문득 제 심장이 여지없이 뛰어짐을 인식했다. 과거의 4월을 닮은 예쁜 향바람이다. 그럼에도 여기저기에서 그녀의 향기가 그득했기 때문에 애써 후미는 고개를 돌렸다. 이치에는 여느때나 이상한 사람이었다. 열기가 가득한 곳에도 딱 보기에 덥기 그지없는 목도리를 고집스레 칭칭 둘러매고 자신은 괜찮다며 장난을 치고 다정한 미소를 남김없이 퍼부어주는 사람이었고, 후미에게 난생 처음으로 감정이라는 허울뿐이라고 생각했던 너울을 담아 건내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언제부터인지는 자세히 몰라도 그녀를 보면 무언가 간질간질하고 가슴 가운데 부분이 흔들려진다. 시기는 자세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럼에도 후미는 이치에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굳이 저 작은 부탁을 말할때에 일부러 그런 물기를 담지 않아도, 후미는 웬만해서는 짜증내면서도 이치에의 말을 다 들어주었을 것이다.



온통 불빛 사이에 두드러지듯 선명히 빛나는 붉은빛이 눈에 따갑다. 후미는 의식하지 않으려 눈길을 돌리려 노력했다. 아직까지도 이치에의 작은 소음은 크게 다가왔다. 통제를 하지 못한 채 고장난 인공지능처럼 허울없이 흔들리는 제 모습에 그냥, 후미는 그러려니 넘기고야 말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문득 아무것도 없이 허전한 바람만을 남겼던 손에 부드러운 촉감이 들었다. 후미는 묵묵히 고개를 돌려 당연할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후미를 그 맑은 눈동자에 들인 이치에는 거짓없이 헤헤 웃었다. 그럼에도, 거칠게 몰아치는 감정과는 반대로 후미는 과묵할 따름이다. 이미 이치에는 익숙한 지 서스럼없이 후미의 손을 소중히 보듬으며 뭐라고 말을 했다. 흐드러진 벚꽃에 절로 날이 뜨거워지는 그런 봄이었다. 그녀는 익숙치 않게 발걸음을 꾸준히 놀리며 시야를 감아 빛을 차단시켰다.



아아, 그때 자신은 뭐라 답했어야 했나. 후미는 여전히 꽃빛을 잊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말하고야 만 그 언어를 다시 상기시켰다.





그래, 그것이 어떤 것이든.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들어줄게. 이치에.





고민없는 대답에 미소를 머금다 옅게 일그러지는 표정이 되살아 난다. 그때 분명히, 너는 슬퍼하고 있었다. 마음을 가득 채우는 아픈 감정에 분명 너는 힘들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대답했던 말이 좋았던 건지, 나빴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확실한 건, 그 말로 인해 네가 부식된 강철과도 같은 고통에 잠식되었단 사실이다.





후미는 눈을 감았다.





차라리 그때 잊겠다고 말했어야 옳았나. 끝끝내 답을 하지 못한 부탁을 덧없이 떠올려 본다.





그럼, 후미. 나를 잊고 행복하게 살아줘.





너를 닮은 꽃빛에 눈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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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각오를 해 두셔야 하겠습니다."

 타마오는 간신히 울음을 참았다. 간밤부터 찾아든 고통에서 이제야 놓여나 곤히 잠든 할머니가 깨어나셔서는 안 되니까. 이곳까지 왕진을 온 의사는 진통제와 수면제, 그리고 타마오가 아직 감당하기 힘든 진실을 남기고 떠났다.

 할머니는 죽어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건강할 때 의체 전환 수술을 했다면 모를까, 이제 와서는 수술을 버틸 체력이 없었다. 전뇌화보다 훨씬 일찍 시작된 의체 상용화 시기도 할머니의 젊은 시절보다는 늦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아마 할머니가 그것을 선택하는 일은 없었으리라. 타마오는 할머니의 이불을 다시 매만지고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왔다.

 거실에 앉아 있던 루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까 떠난 의사와 타마오의 표정을 보고 짐작한 것인지, 루이의 표정도 어두웠다.

 "타마오씨."

 루이의 목소리가 조금 낮게 떨리고 있었다. 옛 연극을 찾느라 채팅으로 만난 이 애의 할머니도 연극을 하셨더랬다. 제대로 무대에 올려보지도 못한 타마오의 연기를 보아주고, 멋있었다고 말해주고, 지금 같은 세상에서도 연기 연습을 같이 하는 동료였다. 그래, 지금 같은 세상에서도.

 연극은 빠르게 쇠퇴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직접적인 자극을 전달할 수 있는 시대. 연극 같은 것보다 재미있는 게 훨씬 많았다. 육신을 가꾸고 훈련하여, 어떤 표정을 지어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은 구식이었다. 연극은 일부 괴짜들이 사랑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무대에 빛이 넘치던 시절을 살아오셨던 분, 자신이 배우고 빛나던 무대를 아직도 그리워하고 계셨다. 사랑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옛 무대를 보면서 자란 타마오가 연극에 대한 열병을 앓은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제대로 발 디딘 적도 없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모교, 린메이칸 여학교를 동경하게 된 것도. 

  "아, 루이쨩. 모처럼 놀러왔는데, 갑자기 이런 일이 생겨서 놀랐지? 미안해, 오늘은 아무래도..."

  "타마오씨.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괜찮으시면, 제안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조금 망설임이 남은 목소리로, 루이는 타마오가 단 한 번도 떠올려보지 못한 일을 제안했다.



 [야호야호! 어서 와, 타마오! 어라? 루이도?]

 발랄한 목소리와 함께 이치에가 짤깍짤깍 부채를 흔들었다. 가상의 아바타를 내세운 인터넷 아이돌인 이치에의 트레이드 마크는 쥘부채였다. 이제는 거의 명맥이 끊긴 전통 예능 라쿠고를 사랑해서 이 곳에 흘러들어온 유유코는, 종종 이치에의 저 부채만 아니었어도 이치에한테 관심을 가질 일이 없었을 거라고 말하곤 했다. 이치에는 그 때마다 유유코가 너무한다며 팔짝팔짝 뛰었다. 커다란 모니터 안에서.

 린메이칸의 이름을 딴 이 채팅 공간은 타마오와 루이가 만난 곳이었다. 이제는 폐과된 린메이칸 연극과에 다니고 싶었던 마음을 따서 만든, 연극 이야기를 하는 공간. 자연히 이 곳에 모인 것은, 그 학교의 이름을 알 정도로는 스러져가는 옛 것에 눈길을 준 사람들이었다. 

 [어서오세요~ 두 사람, 동시 로그인이라니... 혹시 데이트 중에 들어온 건가요?]

 [그, 그,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타마오 씨랑!]

 루이를 짓궂게 놀리는 유유코는 조그마한 토마토였다. 인간형 아바타를 잘 사용하지 않는 덕에 반응을 잘 알 수 없는데, 유유코는 토마토면 곧장 잠들어도 들키지 않으니까요, 하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탁자에 올라앉은 토마토의 옆으로 차가운 인상의 늘씬한 미인이 걸터앉았다.

 [전원 집합? 오랜만이네, 다들 잘 지냈어?]

 [후미~ 보고 싶었어~]

 린메이칸 연극과의 구성원이 모두 모였다. 조금 주저하는 타마오를 보고 루이는 파이팅 포즈를 해주었다.

 [갑작스럽지만... 오늘은, 진지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 같이 고민해줄래?]

 보기 드물게 날아오는 타마오의 빠른 타자에 이치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유코가 조용히 오케이 신호를 올리고, 후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타마오는 심호흡을 하고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타마오의 할머니가... 많이 편찮으셨구나...]

 [타마오, 괜찮아? 아니, 괜찮을 리가 없지. 미안해.]

 [으응, 괜찮아. 그래서 모두와 의논하고 싶었어.]

 루이가 제안한 것은 가상의 린메이칸을 만들어 할머니께 보여드리는 것이었다.

 현실의 린메이칸 여학교 연극과는 폐과되었다. 연극이 쇠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할머니가 들은 소식은 그것이 마지막으로, 학교 부지는 이제 철거되어 새로운 산업단지가 들어설 거라고 했다. 굳이 기쁘지도 않은 소식이기에 전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을까, 삶의 끝자락에서 할머니는 그 곳에 한 번이라도 가보기를 소원하고 계셨다.

 [가능할까? 나는 아무래도, 잘 모르니까. 가상공간에 대해서는...]

 [나는 나이스 아이디어라고 생각해! 루이, 끝내준다~]

 [기술적으로는..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쉽지는 않을지도 몰라. 우선은 공간을 만드는 거부터.]

 [학교라면 제가 지원해볼게요.]

 타마오의 질문에 환성을 올리면서 대답하는 이치에와 진지하게 고민하는 후미의 뒤로,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유유코가 시원스러운 선언했다. 접시에 올라앉아 있던 토마토가 빙글빙글 굴렀다.

 [어차피 조감도도 투시도도 있으니까요. 여기에서 이야기하면서 모인 것도 많아서, 좀만 손보면 학교 정도는 그럴싸하게 만들 수 있을 걸요. 뭐, 다녔던 사람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만드는 건 쉽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오~ 유유코 멋있어~ 이렇게 된 이상, 나도 전력으로 서포트할게! 뭘 하면 좋을까?]

 이치에가 유유코가 앉아 있는 접시를 들어올렸다. 거의 날아올라 토마토를 바치는 춤 같은 걸 추는 이치에의 머리 위에서 유유코가 어지러워요~ 하고 칭얼거렸다. 루이가 이치에를 진정시키고 유유코를 받아내기 위해 발돋움을 하는 동안, 후미가 이치에의 옷 끝을 붙잡아 앉혔다. 그리고는 루이의 손 위에 올라앉은 유유코를 보고 물었다.

 [흐음, 전뇌 성능이 대단한가보네... 아니면 외부 기기 쪽?]

 [그건 어떨까요~ 뭐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저는 무리 같은 거 안 하니까요.]

 [또 비밀? 뭐, 됐어. 그럼 배경은 부탁해, 유유코.]

 "거 보세요, 윳코는 대단하다니까요!"

 루이의 흥분한 목소리가 이어폰과 타마오의 뒤에서 동시에 들렸다. 

 [그럼 현지로는 내가 갈게. 할머니도 타마오도 전뇌화는 하지 않았지? 이걸 이제 와서 쓸 일이 있을지 몰랐는데...]

 후미는 몸이 약한 동생이 쓰던, 비침습방식의 뇌파간섭장치를 확인해보아야겠다는 말을 남기고 공간을 떠났다. 유유코, 내가 안아줄게! 하고 달려드는 이치에를 피해서 토마토가 굴러가고, 이치에는 넘어지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타마오는 눈물을 꾹 참고 타자를 쳤다.

 [정말, 다들 고마워.]
 



  "안녕, 타마오. 맞지? 오랜만이야."

  "야호! 나도 와 버렸어~ 타마오 안녕!"

 아바타와 똑같이 늘씬한 미인인 후미의 뒤에서 이치에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후미야 익히 잘 알고 있는 목소리에 잘 알고 있는 외형이라 대번에 알아볼 수야 있었지만, 첫 만남이라는 건 꽤 낯선 기분이었다. 타마오는 후미를 방 안으로 안내했다. 그 뒤를 따르는 이치에는, 사실 타마오가 단번에 이치에라고 받아들인 게 놀라울 정도로 아바타와 다르게 생겼다. 타마오는 두 사람에게 차를 내주었고, 후미는 입술만 적시다시피 하고는 바로 물건을 꺼냈다. 커다란 두건처럼 생긴 뇌파간섭장치는 사용해본 적은 없지만 생김새만큼은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자, 타마오. 눈 감고. 바로 시작할 거야. 들어가면 우리 채팅공간일테니까 너무 놀라지 마."
 
 후미의 목소리를 따라서 장치를 착용하고, 눈을 떴을 때 타마오는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꼈다. 모니터로 보던 곳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지금 놓인 손 끝이 어디에 있고, 내 표정은 어떻지?

 "오, 타마오씨, 육신이 없다는 것만으로 엄청 헤매네요. 일어나요~"

 "아, 유유코쨩? 으응, 그렇게 쉽지는 않네..."

 유유코일 것 같은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이 공간의 불안스러운 흔들림, 귀로 들려오는 건지조차 알 수 없는 의사의 전달. 아마도 귀로 듣고 있는 것 같은 목소리는 멀어지기도 하고 가까워지기도 했다. 타마오는 어지러움에 일단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나? 조금 느리게 시야가 차단되는 것 같았다.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와 함께 정면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윳코, 장난은 그만해."

 "와아, 방금 본 얼굴이랑 진짜 똑같네! 유유코, 타마오랑 안면 있어?"

 방금 전까지 보고 있던 이치에랑은 다른 얼굴이 타마오의 앞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허공에서 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렇지는 않지만요. 루이가 하루가 멀다하고 타마오 씨 이야기를 하면서 영상을 보여주니까..."

 "와왁, 윳코!"

 어느새 나타난 루이가 버둥거리면서 손을 내저었다. 입을 틀어막고 싶어도 유유코가 보이질 않으니 방도가 없었다. 타마오는 웃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타~마오, 손가락은 안 움직여도 되는데~"

 이치에가 무게가 없는 것처럼 팔랑팔랑 다가왔다. 아, 정말 이치에구나. 타마오는 자신이 방금 현실에서 소개받은 여성보다 이 쪽을 더욱 가까운 이치에로 느낀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그 쪽이 현실이고 오늘 진짜를 만난 것일텐데도.

 "키보드를 사용하던 버릇이 남은 거지. 요즘 세상에 음성도 아니고 키보드라니, 타마오도 참 어지간하다니까~"

 "자자, 시간 없으니까 바로 시작할게요~"

 공중에서 들리는 유유코의 목소리와 동시에 공간에 문이 생겼다. 타마오는 천천히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문 밖은 어떤 호텔방이었다. 옛 린메이칸 여학교의 근처에 있는 숙소라고 했다. 이치에는 방금 밖에서 만난 것과 다름없이 타마오의 손을 붙잡고 이끌었다. 그리고 그 때와 다를 바 없이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음, 나는 타마오가 처음으로 사이버공간에서 움직이는 거니까, 그걸 도와주려고 들어온 거야. 타마오가 어떻게 웃고, 어떻게 말하는지, 어떤 식으로 하고 싶은지를 읽어내고 그대로 만들어내는 게 중요한데, 그렇다고 일일히 의식할 필요는 없어. 타마오의 머리도 늘 하던대로 하려고 할 거거든. 컴퓨터가 그걸 도와줄 거고."

 이치에의 표정은 굉장히 풍부했다. 가상의 모습을 내세운 인터넷 아이돌은, 지금 그가 생각하고 있는대로, 보이고 싶은 표정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도 타마오는 다른 외형을 씌우는 게 아니니까, 관찰이 중요하다고 해야할까? 아마 후미 쪽에서 잘 읽어서 조정하고 있겠지만~ 나는 아이돌 캐릭터일 때는 조금 다르니까. 그래서 표정이 어떻게 출력되고 있는지 좀 더 확인을 해. 손짓도 그렇고. 나 체구도 좀 다르잖아?"

 이치에가 하는 말은 타마오가 거울을 보면서 표정을 살피고 연기를 점검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들렸다. 타마오는 생각했다. 연극은 쇠퇴했을지 몰라, 하지만 연기가 사라진 걸까?



 오늘의 연습이 끝나고, 모두가 나간 채팅 공간. 타마오의 눈 앞에 토마토가 하나 똑 떨어졌다.

  "저기, 타마오 씨."

 유유코는 불러놓고 말이 없었다. 타마오가 유유코를 마주보기 위해 쪼그려 앉았을 때 토마토가 갑자기 커다랗게 변했다. 무릎까지 닿는 커다란 토마토-유유코가 말했다.

  "저도 최선을 다하겠지만요, 할머님이 실망하셨을 때도 생각해두는 게 좋을 거예요."

  "실망?"

  "그렇게까지 육신과 물리적 실재를 고집하는 사람이면, 이걸 허상의 속임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니까."

 토마토는 그대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타마오는 빨리 일어날 수 없었다.



 할머니가 눈을 뜨는 그 순간부터 연극의 시작이었다. 타마오는 단 한 사람의 관객을 위해서 연기하기 시작했다. 할머니를 모시고, 호텔 방문을 열고 나갔다. 도보로는 조금 긴 거리를 가는 동안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타마오는 이 사람들이 전부 유유코가 보여주는 그냥 겉껍데기 영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되새겨야 했다. 그냥 이들을 봤다면, 현실의 길거리에서 보는 사람들과 이 사람들을 구분할 수 없겠지만.

 할머니께서 최근에 거의 움직이지 않으셨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할머니를 휠체어에 앉혀서 타마오가 민다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좋은 요건이 되어주었다. 할머니가 이 공간에 들어올 때, 타마오가 처음 느꼈던 이질감보다 훨씬 적을 것이라고 후미는 말해주었다. 그 말이 맞는지 할머니는 불편한 기색없이 주변을 구경하고 계셨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그 곳. 조금 낡았지만, 깔끔한 린메이칸 여학교.

 교문 근처의 화단의 꽃이 어찌나 탐스럽던지, 타마오는 이 모든 게 사실이 아닌 것을 잊을 뻔했다. 내가 여기 다녔다면 매일 이 화단을 돌보았을 거야. 그리고 저 연습실에서 발성 연습을 했겠지.

 그리고 할머니가 공연을 했다고 말한 무대 위에서, 두 사람은 학교의 학생들이 하는 즉흥극을 구경했다. 연극과는 폐과되었지만,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다는 학생들의 이야기에 할머니는 무척 기뻐하셨다. 학생들의 정체는 말할 것도 없이 '린메이칸 연극과'의 친구들이었다. 반짝이는 이 학교를 사랑하게 되었을 즘에, 짧은 산책이 끝났다.

 다시 긴 길을 걸어서, 두 조손은 숙소로 돌아왔다. 후미는 이 연극을 무사히 끝내기 위해서 방에 돌아와서 눕는 대로 할머니가 잠에 드실 수 있게 뇌파를 조절한다고 했다. 타마오는 꿈에 취한 기분으로 이 연극을 마무리할 준비를 했다.

 "타마오, 이리 오겠니?"

 할머니의 부름에 타마오는 고개를 숙여 다가가려다가, 자신의 머리 위에 있을 간섭장치를 생각하고 잠시 멈추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타마오는 지금 머릿 속에서 움직이는 상상을 하고 있지, 실제로 손발을 움직이지 않을 터였으므로. 그것을 조금 늦게 깨달은 타마오가 할머니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 할머니는 웃으면서 손을 물렸다.

 "타마오, 고맙구나. 멋진 경험이었어."

 그 한 마디를 남기고 할머니는 눈을 감았다. 타마오는 급하게 뇌파간섭장치를 벗었다. 현실에서 할머니의 희미한 웃음기가 어린 입가를 보고서야 타마오는 안도했다.

 "할머니는... 아셨던 거죠?"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모를 동료들과 해낸 연극. 거짓말은 들켰지만, 연극은 성공했다. 기술이 허락한 특별한 무대 위에서 피로한 할머니가 '사랑하던 린메이칸'을, 할머니는 웃으면서 보았다. 타마오는 할머니의 간섭장치를 풀고, 잠자리를 정리해드렸다. 그리고는 다시 채팅 공간으로 향했다. 타마오가 몸 담은 린메이칸 연극과 친구들에게 연극의 성공을 알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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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인공지능 이식센터 서쪽 4구역 모두 처리했습니다.”

 

 깡통이 된 로봇들은 스파크를 튀기며 바닥에 누워있었다. 비가 온 후 축축하게 젖은 아스팔트 도로 위에 가만히 서 있던 여자는 그중 하나를 발로 툭 차고는 골목 속으로 사라졌다.

 

1.

 2073년 4월 22일.

 중립적이고 원리 원칙적인 체계 설립을 위해 인공지능 정치 시스템을 도입한 지 딱 5년이 되는 날이었다. 한낱 기계들에 인간들을 판단할 권리를 주는 거냐며 일어났던 시위도 잠잠해졌고, AI를 내세운 독재 정치가 아니냐는 음모론도 사그라들었다. 시민들은 수용이라기보다는 순응을 한 상태로 객관적이고도 중립적인 인공지능의 통치 아래에 있었다. AI 정치 5주년을 맞아 거리 곳곳의 전광판과 TV 방송은 모두 AI 정치 관련 뉴스로 도배되었다.

 비위 거슬릴 말도 못 하는 것들이 무슨 뉴스야. 웃기고 앉았네. 후미는 이 도시 어디서든 보일만 한 커다란 전광판에 침이라도 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처리 1반(처리 1반은 경찰 안드로이드 훼손 및 처리 담당 1본부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유유코는 싸구려 믹스커피를 대충 휘휘 저어 후미에게 건넸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무실은 한산했다.

 

 “다들 주말 당직은 하기 싫어하니까요.”

 

 유유코는 책상에 볼을 찰싹 붙이며 엎드렸다. 그러는 네가 더 싫어하잖아? 후미는 차마 섞이지 못해 떠 있는 커피 알갱이의 개수를 셌다. 처리반의 임무는 대개 경찰 안드로이드를 때려 부수고, 특이사항이 발견될 때만 본체나 부품 따위를 연구반에 전달해주는 것뿐이라 사무실에 들어오면 금세 지루해지기 일쑤다. 아무튼 오늘은 신형도 없었고 이대로 시간 죽이다가 들어가면 그만이다.

 

 “후미 선배! 연구소 북쪽 3구역에 신형이래요!”

 

 -라고 생각하던 순간에도 일이 다시 생겼다. 오늘은 이대로 끝나겠거니 싶었는데 돈이 썩어나는지 한바탕 때려죽여도 보내고 또 보내고... 레지스탕스의 활약 덕분인지 위쪽에서도 무언가 위기감을 느낀 모양이다. 최근 들어 신형을 유독 많이 본 것 같다. 날이 갈수록 고도화되고 민첩해져서 '훼손 및 처리'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경찰'이라고 하면서 하는 일이라곤 무작위로 잡아들이는 것뿐이면서 고상한 척 AI 정치니, 공정함이니. 다 개소리지.

 

 먼저 준비를 마친 루이와 함께 안드로이드 지능 발달 연구소에 도착한 후미는 구형부터 해치웠다. 카메라에 얼굴이 제대로 포착되기 전에 빠르게 전원을 차단하는 게 관건인데, 신형이 등장하면 카메라도 코어도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워 항상 2인 1조로 작업해야 한다. 유독 골치 아픈 놈이라 그런지 들고 가는 것도 일이었다. 비도 와서 가뜩이나 몸도 축축 처지는데 고철 덩어리나 둘러업고 있고. 와중에 타마오의 부탁을 받아 폐기구역에 부품을 주우러 가야 한다. 토요일 오후에 이게 뭔 고생이냐 싶어 후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2.

 바다라고 해도 믿을 만큼 끝도 없이 넓게 펼쳐진 고물 더미 위에 놓여있는 연보라 머리의 안드로이드가 눈에 들어왔다. 사지 멀쩡한 안드로이드가 하나도 없는 곳에서 (팔다리가 온전하게 붙어있으면 부품이 여기저기 튀어나와 쓸 수 없다) 온전한 상태의 안드로이드를 발견한 건 처음이었다.

 

 "왜 이렇게 깨끗한 거지? 심지어 저 외형이면... 꽤 오래된 모델일 것 같은데요."

 

 그도 그럴 것이 젊은 여자 외형의 안드로이드는 제작되지 않은 지 꽤 오래였다. 인권 문제 비슷한 것도 있고, 인간형으로 만들어진 컴패니언(말동무 로봇.. 뭐 그런 거다) 혹은 가사 도우미 안드로이드는 지금같이 팍팍한 시대에는 수요가 점점 줄어들어 3년 전쯤 모두 단종되었다. 최대한 인간과 비슷하게 만든 외형과 부품 단종 덕에 유지 비용도 꽤 많이 들어 거의 다 폐기되었다고 들었는데. 2050년도 아니고 2073년에 이렇게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런 게 여기 왜 있는 거야...? 으. 진짜 사람 같아서 징그러워."

 

 "인간형 안드로이드는 처음 봐요! 우리 집엔 없었거든요. 연구실에서도 못 봤고. 이거 가져가서 뜯어보면 안 되나요?“

 

 "연구할 게 있어? 더 생산되는 것도 아닌데."

 

 "가져가면 연구실 분들도 좋아하실 것 같은데. 재밌잖아요. 후미선배 오늘 어차피 집에 가셔도 누워만 계실 테고."

 

 뭐? 후미가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일이 없는 주말엔 누워있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으니 반박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여기 덩그러니 버려져 있는 게 좀 이상하기도 하고요..."

 

 "그건 맞지. 알았어."

 

 무거운 신형 고철 덩어리와 요청받은 부품들에 예상 못 했던 옛날 고철 덩어리까지 짐이 한가득 늘었다. 심지어 꼬질꼬질한 차림의 인간형 안드로이드라 시체를 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어깨를 더 무겁게 짓누르는 걸 보니 구형 모델임이 더욱 실감이 났다.

 

3.

 "자세히 보니까 더 징그러운 거 같아. 쓸데없이 리얼해가지고..."

 

 "모델 번호 찾아보니까 컴패니언이네요. 30년은 된 모델이에요. 그리고 컴패니언은 사람처럼 만들수록 고급이었으니까요."

 

 "진짜 오래된 모델인데 용케도 상태가 멀쩡하네. 어쩌다 버렸을까?"

 

 "감당이 더 안 되니까 그랬겠죠. 오래된 모델이니까 부품도 없을 테고."

 

 "머리카락은 왜 이렇게 삐죽삐죽하게 했을까요? 저 시기에는 생머리가 유행이었을 것 같은데... 연보라색 머리도 그렇고."

 

 "폭발한 거 아닐까?"

 

 "폭발이요? 그건 쫌..." 

 

 전원이 꺼져있는 안드로이드를 둘러싼 네 명의 대화가 사뭇 진지했다.

확인해 보니까 별문제는 없고 충전만 하면 될 것 같아. 타마오가 콧노래를 부르며 충전 준비를 하는 동안 유유코는 머리카락을 비롯한 이런저런 부분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 충전 다 됐다!"

 

 "지금 부팅 해볼게.“

 

 "안녕하세요? 당신만의 동반자 CPAH-2319입니다. 저장 공간이 부족합니다. 초기화를 하시면 정상 작동이 가능합니다.“

 

 초기화 버튼이 어디 있더라.. CPAH-2319의 목 뒤를 뒤적거리던 루이가 초기화 버튼을 찾아냈다. 고장 나서 폭발하는 거 아니냐는 후미의 염려를 뒤로하고 CPAH-2319는 정상적으로 초기화를 마쳤다. 이런저런 초기 설정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2319는 컴패니언의 본분을 다하기 시작했다.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식사는 하셨나요? 그러고 보니 맥도날드에 새로운 버거가 나왔다고 하는데요. 드셔 보셨어요?"

 

 맥도날드는 언제적 맥도날드? 없어진 지 10년은 더 된 브랜드 이야기를 하고 있는걸 보면 구형 모델인 게 실감이 났다. 유유코의 말에 의하면 출시된 지 3년 후 정도가 되어서는 업데이트 지원을 안 했다고 한다. 가끔 이런 거에 관해 물으면 2319는 30분이 넘도록 그것에 대해 떠들곤 했다. 원래 주인이 누구였는진 모르겠지만 이런 로봇을 오랫동안 데리고 있었던 걸 보면 어지간히 외로운 사람이었겠다고 후미는 생각했다.

 

4.

 "...그래서 후미 선배가 당분간 2319를 맡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거의 매일 신형이 쏟아지는 마당에 연구실 창고에 자리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냥 폐기하면 안돼? 에이~ 안드로이드의 살아있는 역사인데 이대로 폐기하면 섭하죠. 유유코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후미 선배 집에 아무것도 없어서 텅 비어있으니까. 당분간 부탁드릴게요. 말동무라도 해달라고 하세요."

 

정곡을 찔린 후미는 다시금 2319를 둘러업고 길을 걷게 되었다. 저번엔 시체 같더니 이번엔 납치하는 것 같은 비주얼이 되었다. 범죄 영화의 한 장면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내가 범죄자 역처럼 보이긴 하지만.

 

5.

 2319와 후미는 꽤 즐겁게 지냈다. 처음엔 종일 떠들어대는 게 시끄럽고 지겹기도 해서 수면 모드로 돌려놨던 적도 있었는데, 막상 공백을 메우던 소리가 없어지니 적적한 것 같아 다시 켜 두었다. 타마오에게 혹시 말을 좀 줄일 수 있는 모드가 있냐고 물어봤었는데 아쉽게도 그런 건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2319는 컴패니언답게 소소하게 알고 있는 게 많았다. 평상시에 사무실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면 집에 가만히 앉아있거나 가만히 누워있거나 둘 중 하나만 하던 후미는 2319와 게임도 하고 이런저런 요리도 해 먹고 그랬다.

 2319가 이야기하는 것 중에는 영화도 있었다. 2070년이 넘어서도 유명한 몇몇 고전 영화나 이야기할 줄 알았더니 2319가 매일매일 이야기하는 건 다른 것도 아닌 B급 공포 영화들이었다. 특히 추천하는 작품은 2048년 작품인 <금성인의 야밤 습격>이었다. 이런 것도 이 모델 기본 설정인가? 안드로이드 취향 참 고상하네. 뭐 이런 생각도 했다.

 2319는 이따금 아이돌 이야기를 하곤 했다. 지금은 아이돌은커녕 가수도 많이 없어서, 후미에겐 다소 생소했다. 2319의 머리 스타일이 꽤 특이했던 건 아이돌 컨셉이어서 그런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심야 아이돌 방송 이야기도 하고 이런저런 노래를 혼자서 흥얼거리곤 했다. 후미의 의사는 묻지 않고 혼자서 춤추거나 노래할 때도 있었다. 안드로이드면서 좋아하는 걸 이야기할 때 묘하게 더 신나 보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2319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후미는 춤추고 노래하는 걸 특히 좋아했다.

 

6.

 "너. 진짜 이름이 뭐야?"

 

 후미가 밥을 먹는 모습을 건너편에서 지켜만 보던 2319에게 갑자기 물었다.

 

 "이름이요? 모델명이라면 CPAH-2319에요."

 

 "아니. 이름 같은 거 없어? 내 이름은 유메오지 후미니까. 그런 이름 있잖아. 영어랑 숫자로 된 거 말고."

 

 "저한텐 그런 게 없어요."

 

 가지고 싶었던 이름도? 후미의 질문에 2319는 갸웃거렸다. 전 사람이 아니라서 이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요. 2319의 말에 후미가 헛웃음을 흘렸다. 인간이 아닌 걸 모를 리가 없지. 그렇지만..

 

 "지금까지 CPAH-2319에게 지정된 이름 데이터를 찾아보고 있어요. 이름 지정 권한은 저에겐 없지만, 저 이름 중에선 '이치에'라는 이름이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이치에? 뭐. 나쁘진 않네. 오늘부터 너는 2319가 아니라 이치에야. 후미는 전 주인에게 오랜 시간 동안 뭐라고 불렸는지 새삼스레 궁금해졌으나 초기화 당했으니 알 길은 없었다.

 

7.

 그날 평상시와는 다르게 혼자서 출동했던 게 화근이었던 것 같다.

다른 팀원들의 복귀가 늦어져서 신형임에도 불구하고 혼자 해 보겠다고 나갔는데, 구형이 너무 많아 해치우는 동안 얼굴이 찍혀버린 게 관건이었다. 루이가 복귀하기를 기다리고 출동했어야 했다는 후회 같은 건 구치소에서 하기엔 늦었다. 후미는 가만히 누워 그 시간을 혼자 보냈다. 평상시에 아무것도 안 하던 거랑 별로 다르지 않았는데도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구치소가 처음도 아닌데 궁상맞게 쓸쓸해 하는 본인이 더 적응이 안 되었다.

 후미는 무채색의 천장을 바라보며 이치에가 자주 부르곤 했던 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래도 가사도 제대로 모르지만, 그 노래만 계속 불렀다. 2절 시작 가사가 너의 였는지 나의 였는지 헷갈렸지만 그대로 그냥 불렀다.

 

 "후미 님! 오랜만이에요. 8일 하고도 13시간 4분 51초 만이네요!"

 

 오자마자 키자마자 쨍알쨍알 시끄럽네. 라고 생각하면서도 집에 도착하자마자 불도 켜기 전에 이치에 상태를 확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미는 그 사실을 잊으려고 고개를 저었다.

 

 "후미 님이 자리를 비우신 동안의 소식을 불러왔어요. 4번가 모퉁이에 꽃집이 새로 생겼고요, 그 맞은편에 있던 햄버거집은 없어졌어요. 그리고 A 아파트에서 강도 사건이 있었고요. 그동안 날씨는 대부분 맑거나 눈이 왔답니다!"

 

 고물 안드로이드는 시간 계산 말고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대체 언제의 어디를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는데 쉴 새 없이 그 일에 대해서 또 떠들었다. 이치에가 떠드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만 보던 후미가 나지막하게 말을 흘렸다.

 

 "다 틀렸어. 이 고물아."

 

 말동무조차도 제대로 되어 주지 못하는 아주 오래된 안드로이드였지만 후미는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후미의 방 남쪽에 나 있는 조그만 창문 밖에서는 허울 좋은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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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오리는 여느 때처럼 등교를 위해 기숙사를 나섰다. 그러나 그 앞에 예상치 못한 존재가 기다리고 있었다.


“ 언니..? ”


  시오리는 당황스러웠다. 후미가 집을 나가버린 그 날 이후로 자매는 단 한 번도 연락한 적 없었다. 본가에서도 마주칠 수 없었다. 길을 걸어가다 우연히 마주치는 일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런데 월요일 아침부터 갑작스럽게 자신의 기숙사 앞으로 찾아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시오리는 이런 어색한 상황이 벌어진 이유를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당장 눈앞에 후미가 어딘가 조금 불편해 보이고, 평소보다 왠지 피곤해 보인다는 것은 오랜 시간 봐온 자매로서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후미의 행동에 상처받았던 시오리일지라도, 눈에 띄게 힘들어 보이는 후미에게 쌀쌀맞게 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차라리 후미가 무슨 말이라도 했으면 시오리는 조금 편했을까. 오히려 아무 말 없이, 슬퍼 보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후미가 낯설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시오리는 지금까지 후미의 이런 눈은 본 적 없었다.


“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


  결국 먼저 말을 꺼낸 건 시오리였다. 후미는 그제야 말을 할 생각이 생긴 건지, 입을 벙끗였지만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움이었지만, 역시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후미의 이런 모습은 본 적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자신의 언니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던 시오리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아, 손을 뻗어 후미의 뺨 위로 조심스럽게 겹쳐보았다. 어딘가 아프다던가, 열이 나는 것 같진 않았다. 시오리는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냐고 캐묻고 싶었다. 그리고 물어보기 직전에, 후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시오리, 보고 싶었어. ”


  그 순간, 후미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 울려던 게 아니었는데. 후미는 당장 앞에 있는 시오리에게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리며, 입고 있는 외투의 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았다. 왜 이러지. 이상하네. 후미는 눈물을 닦으며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이상할 정도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더는 나올 눈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후미는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했던 모양이다. 끝없이 흐르는 것들을 닦아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후미는 뿌옇게 변해버린 시야 너머로 일렁이듯 보이는 시오리를 조금이라도 더 섬세하고 선명하게 보고 싶었다. 그러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눈앞에 놓인 거라고는 당황스러워 보이는 시오리의 표정뿐이었다.


" 내일.., 내일 다시 올게. 미안. "


  후미는 자신이 할 말만 마치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이런 모습을 더 보여주기엔 문득 겁이 났기 때문일까. 후미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오리의 시선이 두려워졌다. 약한 모습은, 더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하는 후미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역시 당장의 상태가 걱정된 시오리가 후미의 손을 붙잡으려던 순간, 후미는 그대로 뒤로 돌아 뛰어갔다. 시오리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던 건지, 앞서 뛰어가는 후미를 쫓아갔다. 예전 같았다면 쫓아가기는커녕, 마음껏 뛰지도 못했을 텐데. 지금 같은 상황조차 시오리는 꿈만 같았다. 후미가 예전보다 느리게 느껴지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시오리에게 잡히기 직전이었던 후미가 골목을 향해 방향을 트는 순간, 시오리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분명 눈앞에 있던 후미가 모습을 감췄기 때문이다. 시오리는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철제 쓰레기통도 열어보고, 그 위로 올라가 담장도 살펴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숨을만한 곳은 없었다. 정말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지지 않은 이상. 그러나 숨은 게 아니라, 사라졌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결국 시오리는 후미 찾기를 포기하고 순순히 물러났다. 하지만 수업을 듣고, 연습을 하는 내내 찝찝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

  시오리는 오후 연습을 마치고, 주말 동안 새로 들어왔다는 홍찻잎을 사러 시내에 다녀왔다. 기숙사 통금 시간이 아슬아슬할 때에야 기숙사로 되돌아온 시오리는 쥐죽은 듯 조용한 내부에 자연스럽게 발소리를 죽이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시오리는 홍찻잎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교복부터 벗어서 정갈하게 정리해두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시오리는 책상 앞에 앉아 다이어리를 폈다. 매일 있던 일을 쓰던 다이어리였다. 오늘은 써야할 일이 많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찾아온 후미나, 새로 나온 홍찻잎이나. 시오리는 문득 내일 다시 오겠다고 한 후미의 말이 떠올랐다. 혹시 연락이라도 온 게 있나 싶어 휴대폰을 확인해봤지만, 그런 건 없었다. 정말로 내일 올까. 시오리는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관계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슬슬 자야 할 시간인 것을 확인한 시오리는 방불을 껐다. 그 순간 날카로운 무언가가 심장을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시오리는 벽을 짚고 서서 점점 거칠어지는 숨을 애써 가다듬어보려 했지만, 노력이 무색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호흡은 가빠지고 통증은 악화했다. 어느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려버리는 탓에, 제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에 꽉 막힌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탓에, 누군가를 부를 수도 없었다. 시오리는 죽음이 다가온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있었다. 흔히 주마등이라 말하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시오리는 후미와 했던 약속이 생각났다. 

' 내일 만나기로 했는데. '

  점점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시오리에게 보이는 것이라고는 창문 밖의 홀로 떠 있는 밝은 달뿐이었다. 
 


---


  시오리는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찝찝한 악몽이었다. 죽었다 깨어나는 감각이 너무 생생했지만, 분명 꿈이었다. 시오리는 살아있음이 분명한 감각을 느끼기 위해, 연신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안심과 동시에 또다시 몰려오는 잠기운 탓에, 눈을 깜빡이던 속도가 점점 느려지던 시오리는 누군가가 노크하는 소리에 그제야 화들짝 잠에서 깼다.


“ 시오리! 더 자면 지각이에요! ”


  시오리가 도통 늦게 나오는 날에만 들려오는 메이팡의 목소리였다. 평일의 시작부터 늦잠은 안 된다. 시오리는 침대 위에서 꼬물거리던 것을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등교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기숙사를 나선 순간, 건물 앞에서 서성이던 후미를 발견했다. 후미 역시 시오리를 발견했다. 후미는 숨을 깊게 내쉬고, 시오리에게 성큼 다가갔다.


“ 보고 싶었어. 시오리. ”


  무언가 참으려는 듯 입술을 꾹 깨물고 웃고 있는 후미의 표정은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지만, 어딘가 슬퍼 보였다. 분명 꿈에서 봤던 상황과 똑같았다. 이대로 후미가 운다면, 더더욱. 시오리는 알 수 없는 괴리감이 들었다. 


“ 오늘은.. 나한테 시간을 써줄 수 없을까? 학교에는 내가 연락할 테니까... ”


  시크펠트로 전화를 하겠다는 후미의 말을 자신이 제대로 들은 건지, 시오리는 믿을 수 없었다. 밤새 꾼 꿈보다 지금의 상황이 더 현실 같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후미로부터 전해져오는 온기는,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했다.  후미와 함께 어울리는 일이 관계의 진전을 위한 한걸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시오리는 즉각 거절하기에 왠지 불편해졌다. 잠시 머뭇거리는 틈을 타, 후미는 시오리의 다른 손도 붙잡았다.


“ 부탁이야. ”


  결국 시오리는 거절할 수 없었다. 

/

 시오리는 종일 후미의 손을 잡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후미가 정말로 시크펠트에 전화를 했는지는 시오리에게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 함께 놀았던 놀이터에 가보았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어린아이들이 없는 놀이터는 한적했다. 시오리는 그네에 앉아, 가볍게 발을 굴러보았다. 놀이터 앞에 있던 작은 구멍가게에 들어가서 어렸을 때나 다른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것을 보았던 장난감을 구경했다. 꽤 진지한 투로 사주겠다고 하는 후미를 말리느라 시오리는 진땀을 뺐다. 어렸을 때는 자주 먹지 못했던 솜사탕과 아이스크림도 각각 다른 맛을 사서 나눠 먹었다. 같이 사진도 찍었다. 액정 속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후미의 표정을 바라보던 시오리는 짙은 그리움을 느꼈다. 후미는 민망하다는 듯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지만, 언제나 시오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화관에서는 어렸을 때 함께 보았던 영화가 재상영을 하고 있었다. 별다른 고민 없이 영화관으로 들어간 후미와 시오리는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는 현실이, 더는 꿈만 같지 않았다.

  해는 점점 넘어가고 있었다. 시오리는 시간을 확인했다. 곧 기숙사의 통금 시간이고, 그 전에 헤어져야 했다. 다시 만날 수 있겠지만, 왠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때 시오리의 눈에 들어온 건 작은 관람차였다. 관람차 역시 어렸을 때 함께 탔던 것이었다. 하지만 언니가 기억하고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시오리는 슬쩍 후미의 눈치를 보았다. 시오리를 계속 바라보고 있던 후미가 그 시선을 놓칠 리 없었다.


“ 관람차, 타고 싶은거지? ”


  시오리의 손을 이끌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후미의 뒷모습은 왠지 예전보다 높아 보였다. 넓어 보였고. 그러면서도 조금 수그러든 것 같기도 했다. 알 수 없는 위화감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이끌어주는 이 손의 온기를, 시오리는 좋아했다.

/

“ 낮네.. ”


  어려서 탔을 땐, 관람차가 너무 높다고 느꼈다. 무섭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낮게만 느껴졌다. 시오리는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많은 사람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도시는 노을을 입어 더욱 반짝거렸다. 
시오리는 어느 순간부터 아무런 말이 없던 후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의 후미는 시오리가 그랬던 것처럼,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창밖에 고정한 채, 돌아보지 않았다. 시오리는 굳이 후미를 부르지 않았다. 이렇게 눈이 반짝이는 후미는 오랜만인 것 같아서, 그저 보고 싶었다. 


“ ...이게 시오리의 기억.. ”


  작게 중얼거리던 후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눈물은 뚝 떨어졌다. 시오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우는 모습은, 몇 번째더라. 스쳐 지나가는 기억들이 불분명했다. 하지만 고작 그런 일로 머뭇거릴 틈은 없었다.


“ 언니. ”


  시오리의 부름에 그제야 후미는 시오리를 바라보았다. 눈매 끝에 맺혀있는 눈물이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해 보였다. 


" 응? ”


“ 괜찮은 거지? ”


  하지만 깊숙한 곳까지 캐물을 자신이 없었던 시오리는 더는 캐물을 수 없었다. 캐물었다가, 또다시 멀어진다면. 시오리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시오리는 이렇게 자신을 합리화했다.


“ 응, 역시 예쁘다고 .”


  후미는 언제 울었냐는 듯, 누구보다 활짝 웃었다. 어느 때보다 맑게 웃는 얼굴 위로, 문득 어렸을 적의 후미 얼굴이 비쳐 보였던 건 기분 탓이었을까. 시오리는 이 복잡한 마음을 후미에게 터놓을 수 없었다. 마치 과거의 후미가 그랬던 것처럼, 과거에 얽매여있는 자신을 앞으로 나아가려는 언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또다시 가슴이 욱신거렸다. 마치 간밤에 꾸었던 꿈처럼. 시오리의 상체가 급격히 중심을 잃고 관람차 바닥으로 쓰러졌다. 시오리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살려달라는 듯이 후미의 발목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닿을 수 없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왜 도와주지 않는 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건지. 정말 괜찮은 건지. 묻고 싶은 게 아직 한가득이였는데. 시오리는 눈가에 맺히는 눈물을 느꼈다. 

  후미는 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죽어가는 시오리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무심한 표정 위로 억지로 눌러내던 슬픔은 한치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시선이었다. 

  시오리는 마지막 힘을 짜내, 고개를 돌려 후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눈물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시야는 너무나 흐렸다. 끝내 시오리는 후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또 보러올게.”


  시오리는 분명히 들었다.



---



  아침에 눈을 뜬 순간 또다시 어제의 일들이 꿈처럼만 느껴진다.  

' 아마도 난 죽은 거겠지. 이건 일시적인 오류일 테고. ' 

  꿈이라고 생각했던 몇 번의 죽음을 반복하던 시오리는 문득 언젠간 자신이 서명한 기억보존동의서를 떠올렸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자신의 죽음이었다. 혼자 죽을 때도 있었고, 누군가 바라보는 아래서 죽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구해주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하지만 시오리는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구해지지 못할 운명일 것이다. 자신이 서명했던 계약서 내용에 죽은 자가 겪는 어떠한 현상에 대한 내용은 없었으니까, 분명 오류일 것이다. 더 깊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과정이 어떻든 분명 폐기될 것이다. 기계란 그런 거니까. 게다가 살아있던 사람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기계는 더더욱 엄중히 다뤄지니 말이다. 폐기라는 결론이 나온 순간, 시오리는 가장 먼저 후미를 다시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겁이 났다. 자신을 가둬놓은 사람 중 한 명이겠지만, 그럼에도 시오리는 자신을 찾아주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가 비록 죽음을 방임하더라도.


“ 시오리! 더 자면 지각이에요! ”


  아침에 들려오는 메이팡의 목소리는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매번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몸이 익숙해진 탓에, 다시 잠에 드는 횟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숙사를 나오는 순간 눈이 마주치는 후미도 더는 놀랍지 않았다.


“ 보고 싶었어. ” 


  시오리는 후미의 말에서 언제나 괴리감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후미의 말 한마디로, 시오리에게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느껴지는 애매한 거리감이 사라지는 듯했다. 후미는 몇 번째의 시오리에게 보고 싶었다는 말을 하고 있을까. 그 얼굴은 피곤해 보였다. 날이 갈수록 후미는 우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물론 시오리는 그런 사소한 것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후미에게 주름이 늘었고, 어느 순간부터 다크서클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오직 그러한 사실만이 시오리에게 반복의 척도였기 때문이다. 후미는 예전처럼 반짝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오리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봐주는 그 시선만큼은 여전히 다정했고, 함께하는 순간은 매번 행복했으니까. 후미는 변하지 않는 반짝임을 가지고 있었다. 시오리는 알고 있었다.

/

  후미가 찾아올 때면 시오리는 매번 학교를 빠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학교를 빠지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는 편이 후미가 훨씬 편해 보였기 때문이다. 거절당할 불안함과 간절함으로 고통받는 건 괴롭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하는 행동이었다. 똑같은 루트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느 날은 종일 카페에 앉아 이야기만 하기도 하고, 어느 날은 후미가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기만 했다. 가끔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인 건지, 평범한 학생이라면 알 수 없는 듯한 이야기를 했지만, 캐물을 수 없었다. 시크펠트 중등부 학생인 시오리의 입장에서 이해하지 못한 척하는 게 최선이었다. 둘 중 한 명이라도,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안 됐다. 그 순간 꿈에서 깨게 될 테니. 가끔 후미는 시오리에게 이야기를 바라기도 했다. 시오리는 확실히 후미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싫어하던 학교 얘기를 부탁할 지경이었으니까. 후미는 시오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 있었던가. 시오리는 후미의 표정이 생각나지 않았다.

  후미는 어느 순간부터 시오리를 기숙사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시오리는 이러다가 후미가 에델이나 다른 학생들과 마주치면 어쩌지 싶었지만, 몇 번의 죽음을 반복하면서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시오리 역시 마음을 놓았다. 마주친다면, 그건 그때 생각할 일이었다.


" 조심해서 들어가. "


" 바로 앞인데, 뭘. "


  후미는 기숙사 앞에서 작은 두 손을 꼬물거리며 문을 여는 시오리의 모습을 마냥 웃으며 바라보았다. 후미의 시선을 알아챈 시오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뭘 그렇게 웃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혹시 누가 들을까 그렇게 하진 못했다. 대신 혀를 빼꼼 내밀어 장난스럽게 메롱을 하고 후다닥 기숙사 안으로 들어가는 게 시오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시오리는 시계를 보았다. 곧 있으면 또 오늘이 끝날 시간이었다. 가만히 앉아있던 시오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투를 챙겨입고, 나갈 채비를 했다. 걸음 소리를 죽일 생각은 하지도 않고, 성큼성큼 기숙사 밖을 향했다. 통금 시간은 이미 지났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거, 똑같은 하루가 올 거, 어쩌면 스스로에게 가장 충실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시오리는 하염없이 걸음을 옮겼다. 뺨이 시리도록 차갑고, 두 손에 감각이 사라졌을 때쯤 시오리는 이상함을 느껴, 걸음을 멈추었다. 분명 아까 봤던 가게가 바로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 착각한 건가? ' 


  시오리는 그럴 리 없다는 생각에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주변 가게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이상함은 증폭됐다. 거대한 괴리감의 정체를 한발 앞서 깨달은 시오리의 시선이 어느 곳에도 머무르지 못할 때쯤, 시오리는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또다시 그 가게가 시오리 앞에 놓여있었다.

  시오리는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두 눈가는 경직됐고, 손가락 끝에서는 땀이 맺혔다. 고개를 돌려, 자신이 걸어왔던 곳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밤이라지만, 가로등은 켜져 있었다. 그런데도 유난히 어둡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었을까. 다시 몸을 틀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쭉 난 길이 분명했지만,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둠 그 자체였다. 


' 여기 옆에 뭐가 있었더라. ' 


  시오리는 엉망이 된 사고회로를 억지로 돌려가며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어둡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시오리가 알지 못하니,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 ...이게 시오리의 기억.. ]

  그 순간 후미의 말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기억. 살아있던 시오리가 경험한 기억들.


' 이게 만약 정말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만 구상됐다면? '


  시오리는 바닥에 붙어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던 걸음을 힘겹게 떼어냈다. 


' 내가 기억하는 감각만 구상되어 있다면? '


  무거웠던 처음의 한두 발자국은 점점 빨라지더니, 점차 시오리를 뛰게 만들었다.


' 내 경험들뿐이라면? '


  기억에 갇혔다. 이게 시오리의 결론이었다. 도출된 결론에, 시오리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런 곳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얌전히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전부인 세상을, 시오리는 믿고 싶지 않았다. 진실을 깨달은 대가는 끝없는 절망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빛나고 있지 않던 건 누구였던가. 이런 곳에서는 빛날 수 없었다. 이런 곳에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놓쳤던 손을, 다시 잡을 수 없다.

  시오리는 후미를 찾고 싶었다. 후미를 찾아서, 이제 놓아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아가지도 못하고, 가만히 기다려야만 하는 존재가 가지는 것은 두려울 뿐이다. 시오리는 두 번 다시 기다리는 것만을 전부로 세상을 살고 싶지 않았다. 기억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오리는 이미 확정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하루의 끝에서 시오리는 죽음만을 반복했다. 하지만 죽음은 이제 시오리에게 두려움이 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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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망치는 건 의미가 없었다. 정해진 결말에서 시오리는 도망칠 수 없었다. 죽음의 고통은 어느 정도 익숙해질 수 있었지만,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건 똑같은 하루의 반복이었다.


“ 시오리! 더 자면 지각이에요! ”


  이번에도 들려오는 메이팡의 목소리에 그제야 시오리는 그 정도의 시간이 흘렀음을 깨닫는다.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생각해보았지만, 결론은 똑같았다. 유메오지 후미. 자신의 언니. 시오리 자신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반복되는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이 상황을 초래했을 사람. 

  시오리는 오늘 기숙사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즉, 후미를 만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문 앞에 후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시오리는 지금 상황에서 후미를 만난다면,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변화를 줄 수 있는 건 후미뿐이었지만, 이런 상황에 자신을 몰아넣은 것도 후미였다.

  시오리에게 후미는 더는 구원자로만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시오리는 후미를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끝까지 변하지 않은 자신을 찾아주는 건 후미뿐이었으니까.

  시오리는 어딘가에 연락조차 하지 않고 무단으로 학교를 결석했다. 어차피 누가 자신을 보러오던 그 누구도 자신을 구해줄 수 없단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아무 일 없던 오늘이 돌아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오리는 종일 자신의 침대에 파묻혀 죽은 듯이 잠만 잤다. 그리고 죽을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쯤 당연하다시피 잠에서 깨어났다. 평화로운 죽음은 없었다.  



  더는 잠이 오지 않았다. 잠에 들어 죽는 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지만, 살아있을 때 경험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평생 경험하지 못할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궁금해하는 것이 생긴다면, 영원히 해결하지 못할 호기심으로 남을 뿐이었다.
도저히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불러오는 것을 포기한 시오리는 책상 앞에 앉아 다이어리를 폈다. 매일 같은 날짜에, 매번 다른 내용을 썼다. 하지만 또다시 오늘이 오면 그 내용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시오리는 매일같이 펜을 들어 오늘의 다이어리에 일기를 썼다.


' 나는 누구를 위해서 지금... '


  문장의 끝을 적을 수 없었다. 스스로 정의 내릴 수 없었다. 지금의 나는 살아있는 것인가, 아니면 죽어있는 것인가. 시오리는 몇 번이고 죽음을 반복하는 동안 생각해보았지만,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나아가지 못하는 삶은 그 자체로도 가치가 있을까.

  시오리는 두 팔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앞으로 쭉 뻗은 손바닥의 끝을 잡아 가볍게 뒤로 당겨보았다. 근육이 팽팽하게 땅겨지는 감각들이 생생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을 죽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시오리는 또다시 죽음이 엄습해 옴을 느꼈다. 머릿속이 쨍하고 갈라지듯 아파왔고, 심장은 오래달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점점 뜨거워지는 몸을 이끌어 애써 침대 위에 뉘었다. 무거운 눈꺼풀만이 천천히 깜빡거리는 것을 반복하며, 조용한 방안에서 이번에도 죽어갔다. 
시오리는 어떻게 이런 자신이 살아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



  시오리는 처음 후미를 보았던 날을 생각했다.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마냥 울기만 하던 그 슬픔의 이유를 이제서야 깨달은 것 같았다. 

  처음부터 후미는 더는 반짝이지 못할 시오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기억 속에서 반짝이는 시오리의 모습을 본 순간, 후미는 시오리가 죽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꿈에서 깨어나면 더는 그런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현실을 알고 있었기에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 시오리! 더 자면 지각이에요! ”


  시오리는 메이팡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곧바로 학교에 갈 준비를 했다. 미적거리다 후미를 보지 못하는 일 같은 건 곤란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드디어 후미를 죽이기로 결심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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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숙사에서 나가기 위해 문손잡이를 잡았다. 손에는 땀이 멈추질 않았다. 곧 이 손으로 끝을 보게 될 거라 생각하니, 두근거리는 심장은 당장 죽음에 이르러도 이상하지 않을 듯 했다. 
시오리는 숨을 한번 깊게 내쉬었다. 서로를 위해서라고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끝을 내야 하는 건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시오리는 문을 열었다.

  후미가 서 있었다. 점차 가까워졌고, 두 손으로 목을 쥐었다. 그리고 후미가 도망갈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힘을 주었다. 바라볼 수 없었다. 눈이 마주치면, 분명 약해질 걸 알았다. 그렇기에 시오리는, 후미의 표정을 알 수 없었다.


“ 제발.. 날 놓아줘. ”


  시오리의 마지막 인사였다. 후미는 막혀오는 숨 탓에 캑캑거리면서도, 살려달라는 의사를 내비치진 않았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끝까지 시오리만을 바라보았다. 시오리는 울고 있었다. 자신의 목을 감싼 이 작은 두 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후미는 아무런 말 없이 시오리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웃음이 번져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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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뜬 후미는 자신의 몸 곳곳에 붙어있던 패치들을 떼어냈다.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후미는 얼얼한 목을 매만지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 이번이 몇 번째였죠? "


  그런 후미에게 말을 걸어오는 건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온기는 가지지 못한 인간형 안드로이드였다. 후미의 생활 전반을 보조하며, 연구를 돕고 있었다.


" ... 글쎄. 그래도 열 번은 넘지 않았나? 내가 이렇게 늙었는데. "


  후미는 이번이 몇 번째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점점 힘들어지는 몸이 시간의 흐름만을 가늠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 가면 갈수록 시기가 짧아지고 있어요. "


" 죽이려고 했던 건 처음이었어. "


" 심각하네요. "


  안드로이드의 말에 후미는 작게 웃었다. 고작 기억데이터에 심각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같은 데이터라 그런 걸까. 후미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변수는 오히려 기쁜 일이었다.


" 하지만 처음이었잖아? 내가 모르는 곳에서 무슨 짓을 더 했을지 몰라. 주체적인 행동으로 나아갔으니까.. "


  알 수 없는 정적이 흘렀다. 적막 속에서 웃는 사람은 후미뿐이었다.


" 조금만 더 해보면, 죽은 사람의 기억으로 그 사람의 자아를 재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 "


  후미는 액자 속 어렸을 때의 자신과 시오리가 찍혀있는 사진을 가만히 앉아 바라보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닳아버리는 사진은 현실이었다. 언젠간 사진은 찢어져서,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후미는,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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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태어나는 것 자체로 죄가 되는 자들이 있다."

거리의 가게 진열장에 놓인 TV들이 지지직거리며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내뱉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로 얼굴을 들이밀며 화면을 빤히 쳐다본다. 소리가 날 때마다 귀가 움찔거린다. 눈이 벌게지고 입이 열린다. 후미만이 조금 썩은 사과를 씹어먹으며 뒤에서 지켜볼 뿐이다. 점심시간, 아주 조금의 쉬는 시간 때마다 틀어지는 공익방송이다. 주변에는 무급으로 부려지는 안드로이드들이 가득하다. 도시의 지도자가 직접 녹음해놓은 연설이다.

시선이 유리에 부딪혀 불투명하게 비친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몸짓, 깔끔히 정돈된 옷차림, 일자로 잘려 꾸며진 앞머리. 백옥같은 피부. 그 자체로 선망의 대상이 될만한 인간이다.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 아름답다. 설령 그것이 연출되었다고 할지라도, 믿을 대상이라는 건 누군가에게는 인생과도 바꿀만한 것인가 보다. "에델을 믿으라는 소리는 하지 않겠다." 그러나 믿게 될 것이다. 존재조차 의심스러운 신이라는 작자를 믿는 것과 동급 아닌가. 어떤 면에서는 저자는 더 악질적이다. 존재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하루에도 몇 명씩 위대한 지도자의 구원을 바라며 죽어간다. 떨어지는 비 한 방울에 감복해 그녀에게 감사인사를 한다. 배를 까뒤집고 애교를 부린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건물의 모양대로 잘려나가고 전선에 나뉜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후미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거리를 걸어갔다. 뒤에선 새롭게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최근 사람과 안드로이드 간의 일자리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 지고 있습니다. 설문조사 결과 당연하다는 반응이 68%를 넘어갔고…."

그렇지 않다면 세상이 이리 변했을까. 모두가 죄인이다. 지금 자신의 옆을 지나치는 사람도, 자신이 지켜보는 녀석도. 그리고 자신조차도. 그러니 후미는 의심한다. 발걸음을 빨리했다. 시선을 눈치챈 녀석이 이동 경로를 꼬기 시작했다. 사람들과 발걸음을 맞춰 천천히 걷다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 후미는 그걸 뒤따라 골목으로 들어섰다.

속도감 있게 주변 풍경이 지나갔다. 작게 무언가 터지는 소리도 나기 시작했다. 매캐한 연기가 얼굴을 뒤덮고, 합성수지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모든 사건의 범인이 고함을 지르며 골목 사이사이를 뛰었다. 그가 소리를 질렀다.

"누구야, 제기랄!"

후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드론 하나가 큰 소리를 눈치채고 저쪽 하늘에서부터 날아오고 있었다. 순찰용으로 제작된 엘리시온 제 양산형 드론. 몇 초간 아무런 반응이 없자 드론은 다시 정해진 구역을 순찰하기 시작했다. 골목은 다시 순간 조용해지고, 그는 칫 혀를 차더니 다시 땅을 박찼다. 쓰레기통이 걷어차였다. 넘칠 듯 담겨있던 게 균형을 잃자 쓰레기들이 하늘을 날았다. 후미는 그걸 지켜보다가 반대쪽 골목으로 달려갔다.

후미는 먼저 도착한 후 모퉁이 뒤에서 기다리다 옆구리에 일회용 전기충격기를 갈겼다. 카메라에 찍히더라도, 화면에는 검은 옷을 입고 마스크랑 모자를 쓴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순간 비틀거리는 이 녀석을 잡아 어깨동무하는 영상만 잡힐 것이다. 영상을 확인한 경찰은 코를 파며 지켜보다가 미제 사건으로 처리하리라. 인공지능이 처리할 만한 사건으로 취급되지 않을 수도 있다. 거의 모든 경우에서 사람은 동물보다 못했다.

끝을 모르고 지르던 고함도 잦아들기 시작하고, 끊어질 것 같지 않던 말에는 숨소리가 섞였다. 후미는 제 밑에서 꿈틀거리는 사람을 밟고는, 잠시 기다렸다. 그의 축 늘어져 무거워진 몸이 걸리적거려 밟은 상태로 체중을 싣자, 그는 단말마를 뱉으며 팔다리까지 쭉 늘어졌다. 생명이 스러져가는 소리. 그마저 꼴사납다. 어차피 범죄자의 인권 따위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음으로. 부조리가 하루 이틀인 세상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으로서 할 말은 아니었지만 뭐 어떤가. 지극히 이기적인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발버둥을 치던 그가 조용해지자 밤의 골목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후미는 한참을 주변에서 뒤치다꺼리다가, 한 식경 정도가 지나서야 고개를 들고 이제는 아무도 없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드론 하나가 하늘을 날아다니며 백색 전단들을 흩날리고 있었다. 컬러로 인쇄를 하기조차 아까운지, 모두 흰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자유로운 손으로 하나를 잡아 살펴보니 내용이 시선을 끌었다. 싸구려 종이가 지조 없이 구겨졌다.


`기계공학의 혁명! 최신기술의 결정체! 성적표가 나오는 날이 두려우신가요? 자신의 등급에 절망하셨나요? 쉽고 빠르고 안전한 인조 전뇌보조연산장치 BE-324 부착 시술!`


손바닥에도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크기인 전단에는 무슨 내용이 그리도 많은지, 글자들이 빼곡하다 못해 빈자리를 비집어 들어가며 쓰여있었다. 그중에서도 구석의 작디작은 글자를 발견하고는 들여다보았다. 밤의 거리였으나 가득한 전등들로 곧 한낮처럼 볼 수가 있었다.


`*주의*시술시특별체질에한해아주낮은확률로뇌줄중혹은퇴행증상이나타날수있음을양지하여주시길바라며해당점포는시술중일어날수있는사고들에대해일체민형사상의책임을지지않음을시술자분께서는참고바랍니다.`



특별체질, 아주 낮은 확률…. 해석하기 나름인 문구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전형적인 사기꾼들의 광고들. 이런 전단이 이 도시 안에서는 하루에 수천 개가 나돌아다니고 또 사라진다. 예부터 사람들은 이 광고지들을 갈매기라고 불렀다. 먼 옛날 거리를 지배하던 어느 조류의 일종이라던데, 옛날부터 모두 그렇게 불렀다. 검색으로 나온 사진으로만 봐서는 이런 새가 어떻게 거리를 지배했다는 건지 알 수도 없었으나, 그 의문점을 말하자 어머니는 그저 웃으며 세상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꽤 많고, 너도 곧 깨닫게 될 거라고 하셨지. 아직은 모르겠다. 변한 게 많은 거 같은데, 정확히 뭐가 변했는지를 모르겠다. 그럼 정신은 그대로인 채로 몸만이 자란 것일까.

인기척이 없어진 지 5분째. 숨소리만이 들리고 내뱉어지는 숨에 허연 김이 서렸다. 그제야 결정이 내려졌던 것 같다. 계속하여 고민만 하던 자신을 다시 한 번 채찍질할 용기가.

골목 한구석에서 갈매기들이 불타며 매캐하게 연기를 뿜고 있었다. 시선을 돌리면 널브러진 녀석이 존재했다.


"사진부터 찍고."


(사진을 첨부하겠습니다.)


(확인완료, 두 번째 조건까지 지켜준다면 약속보다 더, 15%를 보내주겠다.)


(노력해보겠습니다.)


대부업체의 인공지능에게 존댓말을 하면서도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돈은 언제나 중요했다. 때로는 자존심보다도. 후미는 눈앞에서 휙휙 올라오는 메시지들을 손짓 몇 번으로 지우고,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주머니 한쪽에서 담배를 꺼내 뻑뻑 피워댔다. 거리 곳곳에서 매연이 피어올랐으니, 작은 담배 연기 하나 추가된다고 그 광경이 이상해지지는 않았다.

"로봇이 무슨, 사람 흉내를 낸다고…."

발밑에 널브러진 그의 찢긴 피부 아래 금속 부품들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세상이 이리 좋아져도 사람들이 변하지 않으니, 적당히 지랄 맞은 세상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피부를 간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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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서부터 골목의 경계를 말미암아 청소로봇 하나가 길거리를 더럽히는 갈매기들을 청소하고 있었다. 후미는 덜덜거리는 기계음을 들으며 걸리적거리는 갈매기들을 한 뭉텅이 걷어차고 그대로 골목을 나섰다.

계좌에 들어온 금액을 확인한다. 차오르는 숫자 몇 자리에 단순히 행복해졌다.

 

(연체된 금액들을 정산합니다._엘리시온 병원 )


(연체된 금액들을 정산합니다._엘리시온 병원)


(연체된 금액들을….)

그리고 다시 불행해졌다. 후미는 고개를 들어 저 너머의 빌딩들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심장부가 이 밤에도 쉬지 않고 격동하고 있었다. 까마득한 절벽. 도저히 넘을 수 없으리라 생각되는 금속의 장벽들. 아스라이 빛나는 조명들 속에서 후미는 눈을 찌푸리고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만한 쥐구멍을 찾아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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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이어라도 태운 건가.

 

 해저터널을 빠져나와 린메이칸凛明館 구에 진입했을 때 유메오오지 시오리가 본 것은 거대한 연기의 기둥들이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지만 연기들은 그 바람에 싸우기라도 하듯 회색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세상에 저게 다 뭐람.

 

 입구는 이미 경비부 사람들이 바리케이드를 쳐둔 후였다. 빳빳하게 풀 먹은 흰 제복을 입은 경비부 사람들은 계속해서 차를 돌려보냈다. 욕을 하건 애원을 하건 가차없이 돌려보낸다. 경비부 직원들은 다들 해가 저물어 가는데도 선글라스를 끼고 일을 보았다. 바리케이드 한 켠에선 트럭을 세워둔 채 경비부 직원들과 누군가가 악을 쓰고 있었다. 화물칸에 붙은 마크를 보아하니 적십자였다. 유메오오지의 SUV가 지나가자 서로 다투던 사람 중 하나가 눈을 홀겼다. 아마 차 문의 회사 로고를 보고 그런 거겠지. 유메오오지는 애써 고개를 돌렸다.

 

 유메오오지의 앞에서 차 여덟 대가 차례로 되돌아갔다. 그 중 한 대는 UN 소속이었고 두 대는 경시청 차였다. 어차피 요즘처럼 돈이 말 그대로 새 주인인 시대에는 둘 다 비슷한 처지다. 이제 유메오오지의 차례다. 그녀는 목에 걸고 있던 사원증을 내밀었다. 아니나 다를까. 경비의 안색이 파래지더니 칼같이 경례를 붙이고, 차를 좌측으로 빼낸다. 워키토키 너머로 몇 마디가 오간다. 초소에서 누군가가 득달같이 뛰어나온다. 다시 한 번 경례. 그 다음엔 다시 상급자가 나오고. 그렇게 몇 번을 하고서야 그제야 수습이 된다.

 

 초소 책임자는 머리가 땅에 닿을 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최대한 비굴한 태도로 그는 유메오오지에게 경비용 자동인형 셋을 붙여줬다. 인형들은 유메오오지가 타고 온 SUV의 뒷자리에 탄다. 예전이라면 유메오오지가 조수석에 타고 사람을 운전석에 태웠겠지만, 지금은 21세기 하고도 중반. 운전이란 행위 자체가 거진 필요가 없다. 위험지역이면 모를까, 사람보단 기계가 차라리 나았다.

 

 모두-모두라 해야 하나?-가 착석하자 유메오오지는 괜히 룸미러로 뒤를 홀깃 보았다. 자동인형들은 다들 흰 제복 차림에 고글형 선글라스를 쓰고, 기관단총을 하나씩 들었다. 자리에 앉자 자동인형들은 털끝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유메오오지는 아무도 모르게 혀를 찼다. 사람이랑 정말 비슷하게 생긴 녀석들이긴 하다. 수백만 달러를 퍼부어 만든 녀석들이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런데도 이놈의 자동인형들은 언제나 유메오오지를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사람같지 않은 놈들이 사람 행세를 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도 흔치 않다. 한 번 더 조용히 혀를 차고 유메오오지는 브레이크를 푼다.

 

 바리케이드를 넘어서고, 차는 천천히 가속하면서 린메이칸 구로 들어선다. 차는 이미 자기가 갈 곳을 안다. 미리 입력한 회담 장소를 향해 천천히 움직인다. 길거리를 둘러보니 상황은 생각보다도 더 심각하다. 길거리 곳곳의 가게들은 합판으로 창문만 막아놓고 문을 닫은 곳이 수두룩하다. 길거리엔 쓰레기들이 나뒹굴고, 사람들의 눈은 흉흉하다. 네온사인들은 사방에서 번쩍대지만 그것마저도 깨져나간 곳들이 보인다. 흰색 바탕에 시크펠트 인터내셔널 마크가 문짝에 박힌 SUV를 타고 지나가는 내내 유메오오지는 몸 여기저기를 긁었다. 온 사방에서 시선이 꽂혔다. 노브를 조정해서 속도 리미트를 살짝 위로 올린다. 모터 소리가 좀 더 크게 울리더니 점차 차는 속력을 붙인다.

 

 유메오오지는 눈으로 차창 너머 린메이칸의 스카이라인을 훑었다. 린메이칸 구의 스카이라인은 덩어리에 가깝다. 집을 원하는 사람은 많고 통제는 느슨하다. 도시 계획 같은 건 어느 새 뒷전으로 사라진다. 이제 건물들은 그냥 버티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새 땅 위로 올라선다. 건물들이 서로 올라가다 어떨 땐 서로 뒤엉키고, 하나가 되고 하면서 그 자체로 생명력을 얻는다. 아차 하는 순간은 이미 늦었다. 린메이칸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유기체가 된지 오래다. 그 유기체 속에서 세속의 법, 기업의 법은 휴지조각이 된지가 오래다. 이 도시를 다스리는 건 누구라도 불가능하다. 전임자도, 그리고 자신의 상관도 입에 달고 살던 소리였다. 아 그렇지. 상관. 린메이칸으로 출발할 때 전화를 달라고 그랬는데 까먹었다. 유메오오지는 문득 그 상관에게 전화를 걸어보기로 한다.

 

 유키시로 아키라의 전화입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삐 소리가 끝나면-

 

 유키시로 선배는 바쁜 모양이다. 문자를 보내본다. 시오리에요. 린메이칸 들어가는 중이니 연락주세요. 유메오오지는 살짝 속이 쓰리기 시작했다. 대시보드에서 과일 맛 곡물 바를 하나 꺼내 문다. 그제서야 속이 좀 나아진다. 계기반을 본다. 15분 후면 목적지 도착이라고 한다. 유메오오지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속으로 외운다.

 

 알 이즈 웰All is well. 알 이즈 웰.

 

 모든 게 잘 될거야.

 

 

 

#2

 갑자기 차가 멈춰선다. 뭐지?

 

 눈 앞에서 차를 가로막은 건 바리케이드다. 시크펠트 경비부에서 쌓은 건 아니고, 시위대들이 가구나 콘크리트 덩어리 등을 되는대로 쌓아 올려 만들었다. 사람의 흔적은 없다. 지키는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길이 막혔습니다. 여기부터는 걸어가셔야 합니다.

 

 갑자기 뒷자리에서 자동인형이 말한다. 완벽한 사람 목소리. 유메오오지는 얼결에 자켓 위로 팔을 쓸어내린다. 억양 없는 사람 목소리는 참으로 소름끼친다. 아니 심지어 묻지도 않았는데 답을 하네. 원래 저런 기능이 있던가? 하긴 저것들은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만든 물건들이 아니니까. 아니면 도쿄 한복판의 제어 센터 요원이 직접 명령을 내렸을 수도 있다. 모를 일이다. 이놈의 인형들은 죄다 블랙박스 투성이다.

 

 유메오오지는 글러브박스를 연다. 벨기에제 권총이 하나. 그리고 20발 탄창이 3개. 권총은 허리춤의 홀스터에 찔러 넣고, 탄창들도 허리 반대쪽의 홀더에다 끼워 챙긴다. 이 정도면 되겠지, 하고 마음을 다잡는다. 내리면서 유메오오지는 괜히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더 훑어본다. 갈색 치노 팬츠. 검은 워커. 흰 바탕에 검은 체크무늬 플란넬 셔츠. 그 위에 걸친 시크펠트 인터내셔널 자켓. 어설프게 현장 나온 책상물림이요 하고 광고를 하는 수준이다. 유메오오지는 자동인형 중 아무나를 골라서 부탁한다.

 

 길 안내 좀 해주겠어요?

 

 네. 이행하겠습니다.

 

 부탁이라 하니 이상하다. 어차피 저 것들에겐 부탁이 아니라 명령인데. 유메오오지는 다 부스러진 콘크리트 조각을 밟으면서 쓴 입맛을 다신다. 그렇게 인형 하나가 앞장을 서고, 유메오오지는 그 뒤를 따른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따라 오는 인형이 하나 뿐이다. 남은 인형 하나가 차에 오른다. 어딘가로 빼내려는 모양이다. 여하간 알 수가 없어. 유메오오지는 진절머리를 친다. 승진을 해도 알 수가 없어 저것들은! 그렇게 거리를 걷는다. 사람들이 하나도 없다. 바리케이드의 옆으로 돌아 골목으로 들어선다. 좌로 꺾고, 우로 꺾고. 다시 우로 꺾고. 쭉 가다가 다시 우로. 유메오오지의 가벼운 발소리. 행진이라도 하는 양 척척대는 자동인형들의 발소리들. 반쯤 부서진 건물들 사이에서 들리는 것이라곤 반사되어 돌아오는 발소리들 뿐이다. 사람이 너무 없는걸. 유메오오지는 자꾸 홀스터에 손을 얹었다 내린다.

 

 그러다 인형이 멈춘다. 유메오오지는 자신이 비좁은 건물 사이의 공터에 있음을 깨닫는다. 부서진 건물 사이로 바람이 분다. 삑. 손목에 찬 시계가 울린다. 메시지: 유키시로 아키라. 그녀는 서둘러 핸드폰을 꺼낸다. 그리고 문자를 연다-

 

 도망쳐.

 

 그 한마디 뿐이다. 인형이 유메오오지를 돌아본다. 총구를 유메오오지에게 돌린 채. 그녀는 훈련받은 대로 최대한 재빨리 총을 뽑는다. 안전장치 푸는 소리났다. 그녀도 서둘러 안전장치를 풀고, 하늘 위와의 교신을 시도한다. 하느님, 제발 쏘는 일은 나오지 않게 해 주세요. 전 데스크워크나 하던 애라고요. 인형은 움직이지 않는다. 저 망할 고글 아래에서 눈이 뭘 보고 있을까? 모를 노릇이다.

 

 무슨 일이야?

 

 인형은 답이 없다.

 

 무슨 상황이지?

 

 침묵.

 

 답해!

 

 순간 뒤에 있던 인형이 유메오오지를 낚아챈다. 묵직한 팔이 그녀의 목으로 감겨오더니, 그대로 꽉 조르기 시작한다. 유메오오지는 서둘러 정지를 외치려 한다. 하지만 팔이 목을 짓누르는 쪽이 좀 더 빠르다. 인형이 팔을 들어올리자 유메오오지의 발이 바닥 위로 떠오른다. 숨이 막히면서 폐부가 쪼그라든다.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권총을 들어 올리려 하자 인형이 뒤에서 그 팔마저 잡아 누른다. 앞에 서 있던 인형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눈이 흐려진다. 고글 안은 보이지 않는다. 발을 버둥댄다. 뒷꿈치로 인형의 정강이께를 차보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다. 유메오오지는 무의식적으로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다. 그리고 최대한 뒤쪽에 겨누고 당긴다.

 

 귀청을 찢는 화약 소리. 인형이 비틀거린다. 팔이 살짝 느슨해지자 유메오오지는 바닥에 풀썩 떨어진다. 맞았나? 맞혔나? 아직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기도 전에, 이번엔 옆구리 쪽에 강한 충격이 온다. 유메오오지의 몸이 붕 뜨더니 바닥을 나뒹군다. 아직도 흐릿한 눈으로 자신이 날려진 쪽을 본다. 인형의 발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온다. 아 그래. 하나가 남았지. 총. 내 총. 총이 손에 없다. 날아갈 때 놓쳤구나. 유메오오지가 바닥을 더듬대는 동안에도, 인형은 구스 스텝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인형이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밟자, 기계는 그대로 파삭 부스러진다. 유메오오지는 그제야 내지른다. 정지! 인형은 계속 걸어온다. 정지, 정지! 간신히 다시 부풀어오른 허파를 쥐어짜 보지만 인형은 계속 다가온다. 인형은 유메오오지의 코앞에 와서야 멈춘다. 명령을 들은 건가? 아니다. 인형은 천천히 기관단총을 들어 올린다. 아. 언니 말을 들을걸. 다시 눈 앞이 흐려진다. 이젠 끝장이다! 유메오오지는 눈을 감는다.

총성이 울린다.

 

 

 

바다 위의 바벨탑

 

 

 

#3

 갑자기 총성이 울리더니, 묵직한 무언가가 나자빠지면서 땅을 울렸다. 유메오오지는 쉽사리 눈을 뜨지 못한다. 대체 어디서 총성이 들린걸까? 꺼져가던 정신이 다시 불이 붙는다. 일단 몸을 더듬어 본다. 없던 구멍이 새로 난 것 같진 않다. 유메오오지는 그제야 천천히 눈을 뜬다. 앞엔 나자빠진 인형이 하나. 관자놀이에 구멍이 하나. 그제서야 유메오오지는 고개를 들어본다. 꽤 큰 키의 여자다. 청바지에 회색 티셔츠. 구불치며 반짝이는 잿빛 금발. 자수정 색 눈동자. 미인이시네요. 목에는 카메라와 수첩. 전술조끼와 허리띠엔 파우치들이 사방에 한가득이다. 그리고 쭉 뻗은 손에는 묵지근한, 아직도 초연을 흘리는 리볼버.

 

 감사 인사는 나중에 받아도 되지?

 

 상쾌한 웃음이다. 유메오오지는 멍하니 있다 그제서야 아, 네, 하고 버벅댄다. 천천히 일어나 본다. 옆구리가 죽도록 아프긴 한데 그래도 심각하진 않다. 금발의 여자는 리볼버를 허리춤에 쑤셔넣고 다가온다.

 

 괜찮아?

 

 글쎄요. 아야. 인형한테 옆구리를 차여서요.

 

 잠시만.

 

 여자는 옆구리에 주렁주렁 단 파우치에서 스마트폰 사이즈의 기계를 꺼낸다. 전원을 넣자 화면에 불이 들어오고, 그걸 환부에 가져다 댄다. 아. 야전용 진단기다. 실시간 X레이 모드를 켰는지 유메오오지의 갈비뼈가 보인다. 기능이 뭐가 있더라. 실시간 X레이. 혈액 분석(별도의 채혈 키트 필요). 클라우드로 실시간 환자정보 업데이트 가능. 이 모든 기능이 대당 19만 8천엔(VAT 포함). 화면을 보니 금간 곳은 없는 것 같다. 유메오오지가 빤히 쳐다보는 걸 깨달은 여자는 고개를 들고 웃는다.

 

 왜 신문기자가 이런 거 가지고 다니는지 궁금하진 않아?

 

 기자셨어요? 아니 그 이전에 뭔 기자가 리볼버를 들고 다녀요.

 

 대부분은 기계에 흥미를 보이던데.

 

 그거 FV-1800i잖아요.

 

 잘 아네?

 

 당연하죠. 제가 원래 그걸 팔고 다녔는걸요. 유메오오지는 속으로 쓰게 웃는다.

 

 여하간 보듯이 금은 안 갔네.

 

 감사합니다.

 

 뭘.

 

 여자는 웃더니 손을 내민다.

 

 인사가 늦었네. 사이죠 클로딘. 메디아파르Mediapart 도쿄 특파원.

 

 유메오오지 시오리에요. 시크펠트 인터내셔널.

 

 유메오오지도 손을 내밀어 잡고 가볍게 흔든다. 사이죠는 환하게 웃더니 공터에 대고 손짓을 한다. 돌더미 사이에서 뿅, 하고 분홍색 더벅머리가 튀어나온다. 키는 꽤 작다. 허리까지 오는 더벅머리 아래에서 황금색 눈동자가 반짝댄다. 양 손을 사방으로 흔들어 제끼면서, 핑크색 머리의 여자는 슬리퍼 신은 발을 사방으로 휘두르며 나온다. 너절한 목 늘어난 옛 락밴드 티셔츠와 짧은 바지만 아니면 어디 아이돌이라고 해도 믿을만큼 정신 사나운 등장이다.

 

 이쪽은 오토나시 이치에. 내 도우미라 하면 되겠네.

 

 에엥, 도우미 이상이지!

 

 네에 네에.

 

 사이죠는 키득거리면서 오토나시의 더벅머리를 부빈다. 오토나시의 금빛 눈동자가 유메오오지를 보고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오토나시가 묻는다.

 

 유메오오지 시오리? 시크펠트 사람이지?

 

 네.

 

 새 책임자야?

 

 저 아세요?

 

 잠시 뒤져봤지, 유메오오지 이사님. 37구 운영책임자.

 

 어? 유메오오지의 눈이 동그래진다. 아니 공식 발표도 안 났는데 어떻게 안 거람?

 

 지금 어떻게 알았나 궁금한 거지? 정지하라고 계속 그랬잖아? 저 깡통들은 시크펠트 간부급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는 게 아니면 긴급정지가 안 된다고.

 

 하지만 제 직함은요?

 

 아주 간단하다네, 왓슨!

 

 가슴을 내밀면서 셜록 홈즈를 읊는 꼬락서니에 유메오오지는 폭소를 터뜨릴 뻔 했다. 도대체 뭐야 얘는? 결국은 사이죠가 끼어들었다.

 네에 네에. 농담은 거기까지.

 

 사이죠는 나자빠진 인형 하나를 가리킨다.

 

 저거 뚫을 수 있어?

 

 오토나시는 고개를 끄덕인다. 호주머니에서 낡아빠진 핸드폰과 한쪽 끝에 청진기같이 생긴 물건이 달린 케이블을 꺼내더니, 인형의 옆에 앉는다. 케이블을 핸드폰에 꽂더니, 청진기를 인형의 이마에 올린다. 그제야 유메오오지는 저 둘이 뭘 하려는가를 깨닫는다.

 

 저거라니, 저 자동인형요?

 

 유메오오지는 손을 내젓는다.

 

 저건 절대로 못 뚫어요. DB740 모델은 누구도 못 뚫는다고요.

 

 그 말에 오토나시가 고개를 들더니 씩 웃는다.

 

 뚫었는데?

 

 유메오오지는 오토나시가 쥐고 있는 핸드폰을 급히 본다. 맙소사. 화면에 줄줄히 사항이 뜬다. 제어센터에서 본 거랑 똑 같은 통제 UI다. 기술부의 한트케한테 보여주고 싶어졌다. 그렇게 안 뚫릴 거라 자신을 하더니 내 이럴 줄 알았어요. 고작 빈민가 꼬마도 한번에 뚫네요 선생님. 유메오오지가 속으로 뭐라 하건, 오토나시는 콧노래까지 부른다. 흥흥흐흐흥. 오토나아아시. 이건 도대체 뭔 멜로디인가 싶다. 사이죠도 본인의 핸드폰을 꺼내 이것저것 만지작댄다.

 

 Mon Dieu맙소사.

 

 핸드폰을 보던 사이죠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다. 자신의 핸드폰을 유메오오지에게 보여준다.

 

 너 지금 실종됐어.

 

 기사는 아직 속보 단계다. 린메이칸 구 운영책임자, 린메이칸 구에서 실종. 소식은 조금씩 더 들어오겠지만 아직까진 이게 전부다.

 오우.

 

 이번엔 오토나시가 휘파람을 분다.

 

 무슨 일이죠?

 

 유메오오지 씨 유명인사네?

 

 네?

 

 사살명령 나왔어.

 

 유메오오지는 뭐라 말하려다 입이 얼어버린다. 사살? 나를? 어느 새 오토나시의 얼굴에서도 웃음이 사라졌다.

 

정식으로 들어온 게 아닌데 이거?

 

 사이죠가 묻는다. 눈은 여전히 기사를 훑으면서.

 

 그러면?

 

 슬쩍 끼워넣었어. 폭동 지휘부 사진에다가.

 

 유메오오지는 정신이 아찔해진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사이죠는 오토나시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둘이 서로 속삭인다. 대부분은 안 들리는 소리지만 그래도 단어 몇 개는 들린다. 시크펠트. 설계. 음모. 불쌍해. 사이죠는 고개를 들어 유메오오지를 본다.

 

 일단은 널 어딘가에 숨겨야겠다

 

 유메오오지는 고개를 내젓는다.

 

 아니, 제가 왜 숨어요. 이거 오해일 거에요.

 

 오해는 무슨. 너 설계당한 거야.

 

 설계는 무슨 설계에요.

 

 유메오오지가 불퉁댄다. 사이죠는 머리를 긁는다.

 

 왜 저 인형이 안 멈췄겠어?

 

 오류일 수도 있잖아요.

 

 여하간 여기 있으면 위험해.

 

 그러면 어떻게 하라고요?

 

 일단 널 오즈한테 보낼거야.

 

 오즈요?

 

 이번엔 오토나시가 고개를 내젓는다.

 

 오즈는 시크펠트 사람 별로 안 좋아할 걸?

 

 다른 방법 있어?

 

 그도 그러네.

 

 결정.

 

 오케이!

 

 오토나시는 엄지를 치켜들더니, 갑자기 돌더미 뒤로 뛰어간다. 낮은 웅웅거리는 소리가 난다. 호버포드? 소리가 커지더니, 돌더미 뒤에서 은색 기계가 떠오른다. 앞은 스테인리스 판으로 만든 봅슬레이 썰매를 닮았고, 그 뒤에 제트엔진 비슷하게 생긴 녀석이 웅웅거린다. 배기구 쪽에선 불꽃은 없지만 노란 불빛이 번쩍인다. 오토나시는 포드를 몰고 둘 쪽으로 다가온다. 포드의 엔진에선 특유의  갓 베어낸 풀 냄새가 났다. 오토나시는 이번에도 엄지를 들더니 외친다.

 

 타!

 

 어. 이거 진짜로 타기 싫은걸요. 유메오오지는 고개를 내저으려다 간신히 참는다. 요즘의 호버포드는 지붕과 창문이 다 있고, 엔진도 전부 카울로 덮어서 깔끔한 모양이다. 그런데 이건 정 반대다. 앞유리 하나만 달랑 있고, 다른 롤 케이지 같은 안전설비도 없다. 동체엔 휴즈Hughes 마크가 있는데 계기판은 또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다. 엔진은 혼다고. 완전 키메라다. 그나마 의자엔 안전벨트가 있지만 그것도 어째 너절하다. 전체적으로 죄다 때와 기름 얼룩에 찌들고 구겨진 모양이다. 이걸 어떻게 타라고!

 

 클로딘도 같이 타!

 

 됐어. 난 네온사인 사이로 곡예비행 하는 취미는 없거든.

 

 그러더니 사이죠는 유메오오지를 번쩍 들어 의자에 앉힌다. 윽. 유메오오지는 불안한 느낌에 서둘러 안전벨트를 맨다. 다행히도 4점 안전벨트다. 벨트를 채우기가 무섭게 오토나시는 포드를 발진시킨다. 바람이 그대로 얼굴로 불어온다. 포드는 제대로 수직상승도 하지 않은 채 거칠게 날아올랐다. 포드 내의 모든 부품들이 덜그럭대며 공포의 합주곡을 울린다. 유메오오지는 비명을 애써 참으며 콕핏 내의 조작 밸브가 아닌 것들 중 손잡이 비슷하게 생긴 건 뭐든지 잡아본다. 앞에서 오토나시는 야호! 하고 외치더니 속도를 더 낸다. 눈 옆으로 부서진 건물들의 잔상이 덩이진 채 뒤로 날아간다.

 

 저기, 시오리!

 

 네, 네!

 

 유메오오지는 간신히 대답한다. 오토나시는 잠시 고개를 뒤로 돌리더니 얼굴 한가득 웃는다. 유메오오지는 앞을 보라고 할 기력마저 사라졌다. 오토나시는 환하게 웃더니 소리친다.

 

 린메이칸에 온 걸 환영해!

 

 참으로 눈물나는 신고식이네요. 유메오오지는 쓰게 웃는다. 포드는 계속 내달린다. 린메이칸의 심장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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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러

이스루기 후타바 x 하나야기 카오루코

 

 

이 세상에 봄이 사라졌다.

이스루기 후타바는 물이 다 빠진 스니커즈를 신고 골목길을 걷는다. 세 달째 이어진 장마 탓에 골목길에서는 참기 힘든 역겨운 냄새가 났다. 후타바는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녹이 슨 컨테이너 건물이나, 콘크리트가 다 깨져 깜빡이는 네온 등, 간판으로만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건물들만 즐비했다. 그리고 골목의 끝에는 「천화류」, 다 부서진 나무 명패가 매달려 있는 일본식 고택이 하나 있었다.

 

 

“어이, 카오루코.”

 

“어라, 후타바 항. 우산을 쓰지 않구요.”

 

“걸리적거린다고, 그런 거. 나 감기 같은 건 안 걸리니까.”

 

 

후타바가 수건을 꺼내 젖은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털며 비닐 봉지를 던졌다. 후타바가 내던진 검은 비닐 봉지 안에는 가장자리가 찌그러진 통조림 두 개와 무른 과일 몇 개가 들어 있었다. 하나야기 카오루코가 못 볼 것을 봤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콱 찌푸렸다. 하지만 벌써 굶은 지 이틀 째였다. 안 그래도 마른 몸은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갔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것쯤은 제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작은 방에서 물 새요, 후타바 항.”

 

“귀찮은 일은 다 나 시킬 심산이지, 카오루코?”

 

“흐응, 그러라고 후타바 항이 있는 거 아닌가요?”

 

“예이, 예이. 아가씨 비위 맞춰 드리는 게 이스루기 후타바의 일이 아니겠어요.”

 

 

대충 덧댈 나무 판자와 못, 망치 따위를 챙긴 후타바가 카오루코가 있는 큰 다다미 방을 나섰다. 관리가 안 된 다다미에서는 나무나 지푸라기의 썩은 내가 나곤 했다. 한때는 산뜻하고 건강한 나무 냄새와, 따뜻한 찻잎의 향기, 카오루코에게서 나는 벚꽃향으로 가득하던 곳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카오루코는 그 큰 방의 한가운데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있잖아요, 후타바 항.”

 

“…뭐야, 비 안 새잖아. 너 진짜!”

 

“내일은 나가지 마요.”

 

“불쌍한 척 넘어가려고 하지 말라고, 카오루코. 어차피… 내일은 안 나가니까.”

 

“역시 후타바 항은 제 말을 잘 듣는다니까요. 상이라도 줄까요?”

 

 

너무 작아 보였다. 실없는 농담을 하는 모습은 철없는 아가씨, 그대로였는데도 몸집이 절반, 절반의 절반, 절반의 절반의 절반으로 줄어든 것만 같았다. 후타바는 베개도 없이 그냥 누워 있는 카오루코의 머리를 조심스레 들어 제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카오루코가 눈을 접어 웃었다. 딱 열일곱의 ‘우리’가 생각났다. 그래서 후타바는 카오루코가 웃는데 울고 싶었다. 후타바는 정말이지 이 비 냄새가 끔찍이도 싫었다. 비는 종말을 예고하듯 영원히 내리고 있었다.

 

 

“후타바 항은 절 배신하면 안 돼요.”

 

“…….”

 

“죽더라도 같이 죽어요.”

 

 

또 쓸데없는 소릴! 후타바는 카오루코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한참 작아진 카오루코를 보고 있자면 그럴 기분조차 사라졌다. 카오루코가 얌전히 후타바의 무릎을 베고 누운 채 백인일수의 한 구절을 읊었다. 화려한 벚꽃 빛 바래 가도다. 꿈결같이 젊음도 바래지네. 장마 지나는 사이. 후타바는 여즉 윤기가 흐르는 카오루코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질하며 이 불운한 일상이 지속되길 빌었다.

 

 

쿵쿵쿵.

 

 

불운한 일상은 아주 쉽게 깨지는 행복이다. 새벽 일곱 시, 아침 댓바람부터 단속반이 들이닥쳤다. 빈민가를 돌며 블랙리스트에 오른 세대들을 불시 검문하는 것은 새로 집권한 정부의 강경한 불순인자 탄압 정책 중 하나였다. 이스루기 후타바 씨! 검문 있겠습니다! 후타바가 침을 꿀꺽 삼키며 카오루코가 숨어 있는 벽장의 문을 꽁꽁 걸어 잠갔다.

 

 

“자꾸 귀찮게 구네! 무슨 일인데?”

 

 

후타바가 문을 열자 제복을 말끔하게 빼 입은 단속반이 뻣뻣한 자세로 후타바를 맞이하고 있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지긋지긋하기 짝이 없었다.

 

 

“이스루기 후타바 씨는 현재 301-3번지에 혼자 거주하고 계시는 것이 맞습니까?”

 

“누구들 때문에 죽은 사람 기억으로 사람 들쑤실 생각이면 꺼져. 난 너희들이랑 달라.”

 

“위증은 엄벌에 처합니다.”

 

“꼴같잖은 예술이니 뭐니, 멀쩡히 살고 있던 사람들을 다 죽여 버린 건 너희 아냐? 이성의 승리니, 과학의 시대니, 다 관심 없어.”

 

“위증은 엄벌에 처합니다.”

 

“내 말 안 들려? 꺼지라고. 죽여 버리기 전에.”

 

“이스루기 후타바 씨는 현재 301-3번지에 혼자 거주하고 계시는 것이 맞습니까? 위증은 엄벌에 처합니다.”

 

“혼자 살아.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는 거야?”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쟁취하였습니다. 제 37차 검문, 질문 사항에 한치에 거짓도 없었음을 이곳에 서명하십시오.”

 

“징그러운 새끼들. 그래, 됐냐?”

 

“이상입니다.”

 

 

단속반이 발을 맞춰 골목 끝으로 사라진 걸 확인하고 나서야 후타바는 카오루코를 안아 들고 벽장 안에서 꺼내 주었다. 고등학교 때만 해도 두 팔로 카오루코를 안아 드는 게 버거웠지만, 지금의 앙상한 카오루코는 깃털마냥 가벼웠다. 아무리 녹슨 후타바여도 카오루코 정도는 한 번에 들 수 있었다.

 

 

“넌 어째 갈수록 살이 빠지냐.”

 

“그래서 싫어요?”

 

“어, 싫은데.”

 

 

저 마른 몸은 한때는 춤을 추기도 했고, 때로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며, 때로는 후타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사랑을 연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후타바가 사랑했던 것은 기모노를 입고 부채를 든 채 고토 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하나야기의 카오루코였다. 카오루코의 옆에서 온갖 수발을 다 들어야 하는 운명으로 나고 자랐어도, 그것이 이스루기의 운명임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한 번도 싫은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후타바의 철없는 어린 주인은 언제나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후타바에게 제일 먼저 보여 줬기 때문에, 후타바는 정말로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더 필요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 봄은 사라졌고, 계속되는 장마가 열도를 덮쳤으며, 어느 대륙에서는 끔찍한 한파가, 어느 대륙에서는 지옥 같은 가뭄이 이어졌다. 어느 나라는 바닷물에 잠겨 사라졌고, 어느 나라는 갑자기 땅이 솟아 모든 도시가 무너졌다. 혼란 속에서 악마들이 눈을 떴다.

 

 

“저 때문에 종일 집에만 있으니까 재미없죠?”

 

“또 실없는 소리 할 거면 TV나 봐.”

 

“TV에는 노래도 없고, 춤도 없고, 드라마도, 영화도,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도 재미없어요.”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 네모난 상자는 뉴스나 과학 다큐멘터리만을 끊임없이 송출해댔다. 아름다운 것은 그곳에 없었다. 아름다운 것은 전부 멸종했다. 하나야기 카오루코를 제외하고는.

예술은 이 사회를 좀먹고 자원을 낭비할 뿐이야. 사람들은 예술에 맘을 뺏겨 생산성을 잃고,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있어. 예술은 없어져야 해. 예술인은 죽어야 해. 죽어. 죽어. 수많은 친구들이 예술을 끌어안고 죽거나, 실종됐다. 후타바는 무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살아남았다. 후타바는 제 손으로 카오루코의 죽음을 꾸미고 장례를 치렀다. 끔찍한 열아홉이었다.

 

 

“카오루코.”

 

“네에, 후타바 항.”

 

“넌 날 배신하면 안 돼.”

 

“어라.”

 

“넌 안 죽어.”

 

 

내가 무슨 심정으로 너의 장례를 치렀는데. 후타바가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참았다. 터진 입술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손등으로 피를 닦아내는 모습이 영 꼴사나웠다. 에이씨, 쪽팔려. 후타바가 가만히 카오루코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앙상한 꽃 가지, 앙상한 나의 주인.

몸을 움직일 때마다 관절이 녹슬고 있는 게 느껴졌다. 후타바는 24시간을 카오루코를 돌보는 데에 오롯이 쏟았다. 카오루코를 이 세상에서 숨기고, 카오루코가 조금이라도 덜 아프고, 조금이라도 덜 마르며, 조금이라도 더 웃을 수 있게. 자신에게 보여주던 반짝임을 더 이상 빼앗기지 않게 하는 데에 모든 정성을 쏟았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했음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후타바 항?”

 

 

눈앞이 새파랗다. 후타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든 세상이 부서지고 있었다. 인식체계가, 운동시스템이, 출력장치와, 모든 것들이.

블루스크린이었다.

 

***

 

 

 

죽은 사람처럼 이스루기 후타바가 바닥에 쓰러져 있다. 차가운 몸과 아무런 반응이 없는 눈동자. 하나야기 카오루코가 몇 번이나 흔들어 깨워 봤지만 LED 등이 빨갛게 점멸하며 오류를 알리고 있을 뿐이었다.

삶에서 겪어 본 적 없는 공포감이 카오루코를 엄습했다. 주변의 모든 인간들이 「안드로이드 대반란」이라는 명목 하에 학살당할 때조차도 카오루코는 겸허했다. 혼자 죽는 것이 아니라면 억울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아름답게 죽여 줬으면 좋겠다고 웃기까지 했다. 하지만 후타바만큼은 카오루코를 포기하지 않았다. 다섯 살 무렵에 선물 받았던 ㈜이스루기의 초기 인간형 안드로이드, 후타바는 네트워크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명령을 자의로 차단했다.

후타바는 카오루코를 죽이는 대신, 살리는 것을 택했다. 대반란에 대한 비밀스러운 반란이었다.

 

 

‘후타바 항은 절 배신하면 안 돼요. 죽더라도 같이 죽어요.’

 

 

후타바는 대답하지 않았다.

 

 

‘넌 안 죽어.’

 

 

후타바는 우리를 말하지 않았다.

카오루코는 차갑게 식어있는 제 손끝을 감싸 쥐며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안드로이드는 죽지 않는다. 어린 시절, 초기 모델인 후타바가 말썽을 부려 AS센터에 데리고 갔던 적도 서너 번 있었다. 나사를 조이고, 부품 몇 개를 갈고,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면 후타바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웃으며 제 이름을 불렀다. 이번에도 분명히 같을 것이다.

 

 

“난 후타바 항을 배신하지 않아요.”

 

 

카오루코가 빗물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

 

 

원고: 세계정부 일본지구 도쿄도 관리자 19307

피고: ㈜이스루기의 서번트파이브 여성형 C타입 005 (설정명: 후타바)

 

 

“피고는 정부의 인간 폐기 정책에 반해, 하나야기 카오루코 씨를 5년 동안 은닉하였습니다. 인정하십니까.”

 

“네.”

 

“피고는 모든 안드로이드에게 명령된 주기적 업데이트 의무를 다하지 않았고, 검문에도 위증을 하였습니다. 인정하십니까.”

 

“인정합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이 있으십니까.”

 

“엿이나 먹어, 개새끼들아.”

 

 

피고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린다. ‘눈물’이라는 것을 처음 보는 판사가 눈에 띄게 동요한다. 3년 전, 대규모 안드로이드 업데이트에서 슬픔이라는 감정 표현은 삭제되었다.

 

 

“피고에게 폐기처분을 선고합니다.”

 

 

더 이상 인간을 닮지 않은 로봇들이 피고에게로 다가온다. 무자비한 힘으로 코어 엔진에 손을 뻗는다. 와지끈, 우직, 부서지는 소리가 잔혹하지만 방청객들은 모두 표정이 없다. 눈물이 뺨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지고, 전원이 멈춘다.

뒤이어 인간을 닮은 로봇이 피고였던 것에 다가와 부품을 해체, 쓸만한 것들을 분별한다. 더 이상 이스루기 후타바는 존재하지 않는다.

 

 

Final log

#longlivetheus

#loveu

 

 

기록에 남은 ㈜이스루기의 서번트파이브 여성형 C타입 005 (설정명: 후타바)의 유언이었다.

더보기

* 논커플링입니다

 

 

화려한 네온사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건물. 하늘을 떠도는 드론들과 여기저기 쌓여있는 망가진 로봇들. 무리를 이뤄 패싸움하는 인간과 로봇. 그 사이를 분홍 머리의 어린 여자는 무섭지도 않은 듯 이어폰 속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휘파람을 불며 걸어갔다. 여자는 이어폰을 뚫고 들어오는 싸우는 소리가 거슬렸던 건지 남은 손으로 귀를 후비며 발에 걸리적거리는 로봇의 머리를 패싸움 중인 무리를 향해 찼다. 무리는 갑자기 날아온 로봇 대가리에 성질을 내며 여자를 바라봤다. 여자가 누군지 확인한 무리 전원은 황급히 얼굴을 가렸다.

 

"안녕~ 얼굴은 이미 다 읽어서 굳이 가리지 않아도 돼~ 다음부턴 조용히 해줘, 알겠지?"

여자는 손을 흔들며 무리를 지나 크고 높은 건물로 들어갔다. 제일 위층으로 올라간 여자는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 있던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수많은 컴퓨터와 모니터가 있었고 여자는 가장 가운데 컴퓨터 앞에 앉아 코드를 하나 집어 들어 자신의 손목과 연결했다.

'인식 중'

.

.

.

'인식 완료'

.

'프라우 페를레, 츠루히메 야치요'

야치요가 컴퓨터와의 인식이 완료되자 꺼져있던 모든 컴퓨터와 모니터가 주르륵 켜졌다. 야치요는 별 신경 쓰지 않고 익숙하게 아까 본 무리의 얼굴을 컴퓨터에 등록했다. 등록이 90%정도 진행될 때 즈음 누군가 밖에서 노크하고 들어왔다. 보라색 머리의 여자는 야치요에게 다가가 걱정하는 말투로 말을 걸었다.

 

"야치요, 누가 괴롭혔나요? 저 사람들이 그런 건가요? 바로 처리하고 올까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너무 시끄러워서 주의만 주려고~ 메이팡, 내가 걱정된 거야?"

 

"당연하죠! 야치요는 항상 이런 일에 쉽게 말려들었잖아요!"

 

메이팡은 짐짓 화난 표정을 지으며 야치요를 내려봤다. 야치요는 맞는 말이라며 후훗하고 웃어넘겼다. 별일 아닌 것을 확인한 메이팡은 야치요에게 그래도 조심하라며 주의를 주고 방을 나갔다.

넓은 방에 다시 혼자가 된 야치요가 등록이 완료된 컴퓨터와의 연결을 뽑고 타자를 몇 번 두들기더니 화면에 ‘Complete’라는 글자가 떴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맞춰서 노크도 없이 누군가 방에 들어왔다.

 

“아, 아키라 선배~ 무슨 일이신가요?”

 

“프라우 페를레. 아무리 둘만 있다고 해도 호칭은 바르게 해라. 그것보다 여기 파일에 있는 놈들. 지금 바로 조사 가능한가?”

 

야치요는 아키라가 건네는 파일을 받아 한 번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과 나이뿐인 파일을 컴퓨터에 연결해 자판을 몇 번 두들기니 얼굴과 소속, 전과 등등이 뜨기 시작했다. 20명 남짓한 인간의 정보가 하나둘 채워지기 시작하자 야치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프라우 플라틴, 정부 쪽 사람들은 안 건든다고 하지 않았나요? 왜 죄다 정부 쪽 사람들..."

 

"명색의 시크펠트가 보안 부분에서는 굉장히 허술하더군. 별다른 인식 작업도 없이 얼굴만 보고 이렇게 막 들여보내줘서야... 잘 자라. 자고 일어나면 여기보다 훨씬 편안한 방에서 깨어날 것이야."

 

아키라의 모습을 하고 있던 사람은 야치요의 목 뒤로 전기충격기를 들이댔다. 무방비 상태였던 야치요는 피할 새도 없이 그대로 자리에서 쓰러졌다. 바닥에 쓰러져있는 야치요를 옆으로 밀어둔 아키라 모습의 사람은 컴퓨터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야치요의 인증으로 인해 보안이 풀려있는 컴퓨터에서 조직에 관련된 중요한 자료를 전부 연결되어있는 파일 쪽으로 넘겼다. 아키라 모습의 사람은 전부 옮겨진 파일을 컴퓨터에서 흔적이 남지 않게 제거 후 야치요를 들쳐업고 유유히 방을 나섰다.

야치요가 사라진 걸 눈치챈 건 5시간 후였다. 밖을 나돌아다닐 땐 보고가 필수였던 시크펠트였기에 임무를 부여하려 방에 들어간 아키라는 아무 보고도 없이 사라진 야치요를 보고 바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아주 잠시 자리를 비웠을 수도 있기에 아키라는 비상을 걸기 전 CCTV를 먼저 확인했다. CCTV는 메이팡이 야치요의 방에 들어갔다 나온 후로의 파일이 누락되어있었다. 그 점을 확인한 아키라는 즉시 비상을 걸었고 에델을 집합 시켜 회의를 시작했다.

 

"프라우 페를레가 사라졌다. 프라우 루빈, 아까 프라우 페를레 방에 들어간 듯 보였는데 이상한 낌새 느껴지는 거 없었나?"

 

"제가 들어갔을 때 조직 앞에서 패싸움하던 무리가 시끄러웠다며 얼굴을 등록하고 있었습니다. 그것 말고는 별거 없었습니다."

 

"음... 결국 그 컴퓨터가 답인가..."

 

아키라는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빈 서류를 만지작거렸다. 야치요의 컴퓨터는 야치요만이 접근할 수 있도록 락이 걸려있으며 컴퓨터 속 프로그램 대부분 야치요가 직접 만든 것이기에 아무도 야치요의 컴퓨터를 쉽게 건들 수 없었다. 잘못 만졌다가는 지금까지 모아둔 방대한 자료를 잃는 것은 물론 야치요를 찾는 부분에서도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이 상황을 모를 리가 없는 에델은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복제 코드라도 남겨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복제 코드.... 복제 코드..."

 

아키라는 풀릴 생각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답답한 마음을 중얼거렸다. 적막만 흐르는 회의실에는 마치 산 꼭대기에서 야호라도 외친 듯 아키라의 혼잣말이 메이팡에 의해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복제 코드... 아! 야치, 아니 프라우 페를레 복제 코드 있습니다! 저번에 분명 저한테 복제 코드를 어딘가에 심어두었다고 한 적이 있어요!"

 

메이팡은 밝아진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회의실 떠나갈 듯 큰소리로 외쳤다.

 

"오 진짜? 어디 있는지도 말해줬었어?"

 

"아니요... 그건 비밀이라면서 얘기해주지 않았어요. 대신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힌트를 줬었어요!"

 

미치루는 메이팡의 애매한 대답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아키라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서류만 만지작거렸다. 둘의 표정으로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 건지 파악한 메이팡도 좌절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에 회의실엔 한숨만 가득했다.

그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시오리는 무언가 눈치라도 챈 듯 자신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저... 한테 심어둔 거 아닐까요?"

 

"?"

 

"저번에 자가 치료할 때 알 수 없는 코드를 하나 발견했었어요. 제 프로그래밍을 프라우 페를레께서 하셨으니까 그 때 심어두신 게 아닐까 싶어서..."

 

시오리는 말끝을 흐리며 아키라의 눈치를 살폈다.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는 아키라에 시오리는 괜한 말을 했나 앞에 놓인 서류를 괜스레 구겼다. 그러나 아키라는 자신 없는 듯한 시오리의 말투에 불만을 가졌을 뿐 시오리가 한 말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아키라는 미치루를 따로 구석으로 불러냈다. 또 한참을 얘기하더니 돌아온 둘은 시오리를 데리고 야치요의 방으로 향했다. 메이팡도 자연스럽게 셋을 따라갔다.

 

"저... 괜찮을까요? 만약 이 코드가 복제 코드가 아니라면 프라우 페를레는..."

 

"괜찮아. 지금 우리에게 방법은 없어. 만약 아니라고 하더라도 결정은 나와 프라우 플라틴이 한 거니까 프라우 야데는 아무 잘못 없는 걸. 그러니까, 빨리 해볼까?"

 

시오리는 불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코드를 집어들었다. 자신의 손목과 연결하기 전 자신의 양 옆에 서 있는 미치루와 아키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미치루랑 아키라는 눈을 맞춰주고 괜찮다며 웃어줬다. 아키라는 코드를 연결하지 못하고 울상인 시오리 대신 자신이 직접 코드를 연결해줬다.

'인식 중'

.

.

.

'인식 완료'

.

'프라우 야데, 유메오지 시오리”

코드를 연결한 순간 눈을 꾹 감은 시오리는 인식 완료되었다는 컴퓨터의 음성에 천천히 눈을 떴다. 수많은 모니터의 불빛으로 환해진 방은 시오리를 안심시켰다. 오른쪽 끝에 위치한 마지막 모니터마저 켜진 것을 확인한 시오리는 키보드 위로 손을 올렸다. 그러자 가장 큰 가운데 모니터가 멋대로 화면을 바꾸더니 어느 방을 비추었다.

 

"시오리~ 안녕~"

 

"에?"

 

방을 비추던 화면 속 왼쪽 구석에서 분홍 머리가 찰랑거렸다. 시오리를 두어 번 정도 더 부른 후에야 자신이 화면에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닫고 화면 안으로 들어왔다.

 

"프라우 페를레, 호칭. 아까도 주의 줬을 텐데."

 

"아~ 아까 전기충격기때문에 목이 안 돌아가는 것 같은데~"

 

"프라우 플라틴? 전기충격기는 무슨 소리일까?"

 

아키라는 웃으며 쳐다보는 미치루의 눈을 애써 피했다.

 

"이게 무슨... 상황..."

 

"아, 별 건 아니고 그냥 몰래카메라 같은 거랄까. 해킹이라면 자신 있지만 프로그래밍은 나 스스로도 영 못 믿겠어서 확인 겸 시오리가 프라우 야데의 자격이 있는지도 확인할 겸~ 뭐, 이 정도면 합격이네. 그나저나 프라우 플라틴 여기 어디인가요?"

 

"임무다. 거기 어딘 지 스스로 파악하고 탈출하길. 참고로 타임어택이다. 딱 2시간 남았군. 2시간 후 어떻게 될진 알아서 생각하길. 그럼 모두 돌아가 각자의 업무를 보도록."

 

"프라우 플라틴...? 진심이신가요...? 플라틴?? 아키라 선배??? 두목???????"

 

이미 모두가 빠져나간 야치요의 방은 모니터 속에서 소리를 지르는 야치요의 목소리만이 가득 찼다.

 

 

안녕하세요! 주최자 고독한 바나나입니다

사이버 펑크란 소재로 꼭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전부터 했었습니다만, 이렇게 합작을 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네요!


아무래도 소재가 소재인지라 혹시 신청 인원수가 적어 열리지 않을까 긴장도 했는데,


예상외로 많은 분들이 참여해주셔서 기뻤고 다시 한번 신청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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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두 번째로 열어본 합작의 편집이라 처음에 많이 헤맸지만, 그래도 이렇게 완성을 하니 뿌듯하네요ㅎㅎ

이 영광을 같이 편집해준 친구 농노에게 바치겠습니다